이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 우리가 놓치고 있던 이슬람과 중동 문제의 모든 것
서정민 지음 / 시공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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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스페인을 다녀오면서 이슬람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있습니다. 과거 이 지역을 다스렸던 이슬람제국이 유대교와 기독교에 대하여 개방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시대적 배경에 따라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는데, 예를 들면 1125년 아틀라스 산맥에서 반란을 일으켜 22년에 걸친 오랜 전쟁 끝에 알모라비데 왕국을 무너뜨린 알모아데(Almohade, ‘신의 일체성을 주장하는 자들’이라는 뜻)족은 이슬람근본주의를 추종하였습니다. 이들이 코로도바를 점령하면서 후기 우마이야왕조와 알모라비데왕국에 이르기까지 무슬림과 유대인들이 서로를 인정하던 공존의 분위기는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알모아데왕조가 들어선 다음 이슬람 사회에서 벌인 종교탄압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자크 아탈리의 역사추리소설 <깨어있는 자들의 나라; http://blog.joins.com/yang412/13553678>에서 가늠할 수 있습니다.

 

알모아데왕조의 통치이념이었던 이슬람근본주의는 오늘날 화두가 되고 있는 이슬람 원리주의와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초기 이슬람으로의 회귀’를 내세우는 이슬람 원리주의가 등장한 것은 무슬림 공동체의 쇠락과 연관이 있습니다. 초기 이슬람은 정교일치의 지도이념으로 강력한 정치체계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근세에 들어 서구가치의 정치이념 혹은 아랍민족주의와 같은 세속적인 정치이념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이슬람이 정치와 분리되어 종교적 범주에 머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랍민족주의가 실패했다는 결론에 이르자 이슬람원리주의가 등장한 것입니다. 이슬람원리주의는 종교부흥과 사회개혁의 필요성이 강조되었다는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대체적으로 급진적인 경향을 나타냈다고 합니다(지중해지역원 지음, 지중해의 전쟁과 갈등 290-300쪽, 이담북스, 2012년; http://blog.joins.com/yang412/13580816)

 

이슬람 원리주의를 설명하고 나선 것은 최근에 극단적인 행동으로 국제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IS (Islamic State, 이슬람국가)를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달 초에 [북소리]에서 소개했던 <100년의 기록>을 우리말로 옮긴 서정민교수가 IS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원리주의의 진면목을 소개한 <이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를 제대로 읽기 위한 몸풀기라고 할까요? 중동문제 전문가인 서정민교수는 IS가 이라크나 시리아 등의 주근거지를 넘어 북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등지에서도 동시다발테러를 일으키면서 세력을 무한 확장하고 있으며, 특히 이들이 인터넷과 SNS를 통하여 전 세계의 청소년들을 동조자로 끌어들이는 등 국제사회를 위협하고 있는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금년 초에 터키여행 중에 사라진 김모군이 IS에 합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충격을 준 바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저자는 현재 중동과 유럽 등에서 발생하고 있는 이슬람주의 과격단체와 그들이 일으키는 테러공격의 이념적 배경을 설명하여 이들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밝힘으로써 우리의 젊은이들이 이들에게 현혹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들을 과격 이슬람주의자로 규정하고, 이들의 행동은 이슬람율법을 위반하고 있다고 잘라 말합니다. 즉 이들은 자신들의 영향력과 권력을 강화하고 확장하기 위하여 이슬람의 가르침을 극단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자살 폭탄 공격은 이슬람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인데, 이슬람이 자살을 금하고 있는 것은 피조물의 생명을 거둘 수 있는 권리는 오직 창조주 알라에게만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중동의 뜨거운 감자로 등장하고 있는 IS를 포함한 과격 이슬람주의가 태동한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고, 이어서 근세 이후에 등장한 무장조직들을 소개하고 마지막으로 최근 주목을 받고 있는 21세기 테러의 전형, IS를 설명합니다.

 

대천사 가브리엘의 계시를 받아 이슬람을 창시하고 이슬람 국가를 건설한 무함마드와 그의 뒤를 이어 아부 바크르, 우마르 이븐 알 카탑, 우스만 이븐 아판 그리고 알리 이븐 아비 탈립이 이슬람 사회를 영도하던 정통 칼리파시대가 가장 이상적인 이슬람사회 혹은 이슬람국가로 무슬림들은 간주합니다. 정통 칼리파 시대에 무슬림들은 북아프리카와 지금의 중동 지역 전체를 정복하여 거대한 이슬람제국을 형성하는데 필요한 기반을 닦았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종교와 민족이 이슬람 제국에 편입되면서 이들과의 관계를 설정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이슬람제국에 편입된 피정복 주민에게는 세 가지의 선택지가 주어졌습니다. 이슬람을 수용하거나, 자신의 종교를 유지하되 지즈야(jizya)라는 인두세를 내거나, 아니면 싸우거나 떠나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면에서 보면 상당히 관용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정통 칼리파시대에 광대한 영역을 아우를 수 있었던 것이 이슬람원리주의자들에게도 좋은 논리적 배경이 되었습니다. 즉, 이슬람 세계가 약화되어 유럽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지금까지도 서방에 뒤처져 있는 암울한 상황을 타개하려면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초심이란 선지자 무함마드가 알라의 계시를 전하면서 빈부격차, 지나친 물질주의, 상류층의 부도덕성, 개인주의, 권력남용 등의 기득권 세력을 공격하여 사회를 개혁하려는 노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통 칼리파 시대에 이어 등장한 왕조들, 특히 압바스왕조가 이슬람제국의 영역을 서쪽으로는 이베리아반도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인도북부에 이르기까지 확대시킬 수 있었던 것은 점령한 지역을 포용하였을 뿐 아니라, 다양한 지역에서 꽃피웠던 학문적 문화적 성과들을 모아 정리하고 재해석하는 한편 새로운 학문으로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있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과거의 역사는 시대적 상황이 꼭 같지 않기 때문에 되풀이 할 수 없으며, 지금의 상황에 맞는 새로운 접근방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처음 들어설 때는 영원토록 이어질 것 같던 왕조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부침이 생기기 마련이고, 그 과정에서 권력을 둘러싸고 암투가 벌어지기도 하며, 중앙권력에 대하여 반란이 일어나는 것은 필연적인 일입니다. 결국 제국은 와해되어 소왕국으로 분할되거나 이웃의 제국의 침략을 받아 지배를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슬람제국 역시 이런 운명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특히 이슬람제국과 오랜 세월에 걸쳐 충돌해온 기독교 세력은 유대교와 함께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비극의 시초가 되었던 셈입니다. 예수가 탄생한 예루살렘은 기독교의 성지인데, 예루살렘은 오랜 세월에 걸쳐 이슬람이 지배해왔던 터라 중세 유럽사회의 화두가 되었던 성지탈환을 위한 십자군전쟁을 시발로 하여 이슬람과 기독교세력의 충돌은 불가피했던 것입니다.

 

저자는 과격 이슬람주의가 등장한 것은 1258년 압바스왕조가 바그다드까지 쳐들어온 몽골에 무너진 시기로 보았습니다. 이 지역을 지배하게 된 몽골세력은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자신들의 이슬람 해석에 따라 통치하게 된 것입니다. 이 시기에 태어난 과격 이슬람주의의 아버지라고 하는 이븐 타이미야는 알라의 계시와 예언자 무함마드의 가르침을 글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강조함으로써 기득권 세력과 갈등을 빚었지만,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점차 늘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슬람 원리주의를 확립하고 집대성한 이븐 타이미야는, “몽골에 의한 이슬람 제국의 몰락을 무슬림들이 올바른 길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슬람 세계는 무지, 불의 그리고 지식과 믿음의 상실이 이슬람 사회의 후퇴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오직 쿠란과 무함마드의 언행록 하디스에 집약된 이슬람의 본래 사상과 이념으로 돌아갈 때 이런 병폐가 치유된다고 믿었다.(73쪽)”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역사가 재현될 수 없는 것은 모든 상황이 동일하게 짜 맞추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흘러간 물이 물레방아를 다시 돌릴 수 없는 것처럼 과거에 성공적으로 작동했던 이슬람 원리주의가 현재의 이슬람세계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그저 희망에 불과하거나, 혹은 그런 제안을 하는 사람이 추구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책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몽골의 침략으로 이슬람제국이 붕괴되면서 분열된 이슬람 공동체를 다시 통합한 것은 아랍인이 아닌 소아시아 출신의 오스만터키였습니다. 1300년 경, 작은 국가로 등장한 오스만터키는 아라비아반도, 북아프리카를 거쳐 지브롤터 해협에 이르고, 시리아와 이라크를 넘어 페르시아에 이르렀으며, 북쪽으로는 우크라이나 초원과 오스트리아의 빈 가까이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683년 빈을 포위한 공격에서 오스트리아제국에 패한 다음 유럽세력에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이슬람 사회에 등장한 것이 이슬람부흥주의, 혹은 이슬람계몽운동이었는데, 1798년 프랑스가 알렉산드리아를 무렵으로 점령한 것이 무슬림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던 것입니다. 자말 알 딘 알 아프가나가 이끈 이슬람부흥운동은 이성을 존중하고 과학기술을 중시함으로써 이슬람의 부흥을 가져올 수 있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압바스왕조가 꽃을 피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이슬람부흥운동은 무슬림 형제단을 설립한 하산 알 바나 와 같은 온건 이슬람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20세기 중반 이집트 사회에서 무슬림형제단이 최대의 사회정치세력으로 성장하자 정부는 이들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무슬림형제단 역시 비밀무장단체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대부분의 아랍 국가들은 유럽국가의 식민지배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는데, 독립 국가를 지배하는 세력들은 권위주의적인 유럽식민통치방식에 따라 중앙집권방식에 따라 통치하기 시작했고, 억압적인 국가에 저항하는 이념과 운동이 출현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습니다. 현대 이슬람 과격주의가 태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특히 이란의 과격 이슬람주의자들이 팔레비왕정을 무너뜨리고 이슬람혁명에 성공하면서 레바논의 헤즈볼라와 같은 이슬람 과격주의자들은 크게 고무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동서냉전이 심화되면서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것을 계기로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가 합작하여 이슬람용병들을 훈련시켜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한 소련군을 몰아내기에 성공한 다음, 이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것이 알 카에다입니다. 아프가니스탄의 해방 이후에 알 카에다의 구성원들은 아랍 국가들로 흘러들어 대 서방 테러활동을 강화하기에 이르렀고, 그 일부가 IS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사담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이계기가 되어 시작한 이라크 전쟁을 통하여 사담 후세인의 철권통치가 무너진 다음에 사담 후세인의 진영에 있던 전사들이 IS에 가담하게 되면서 세력이 급속하게 팽창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과격 이슬람주의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IS 역시 출범 초기부터 자신들의 활동목표는 이슬람법에 기반을 둔 이상국가를 건설하는데 있다고 천명하였습니다. IS의 지도자 알 바그다디는 이름을 아부 바크르로 바꾸고 자신을 칼리파라고 선언했는데, 아부 바크르는 무함마드 사후에 이슬람공동체를 다스린 첫 번째 칼리프의 이름입니다. 이슬람법에 따르면 칼리파는 전 세계 무슬림들에게 충성을 요구할 권리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무슬림들의 정서를 교묘하게 자극하여 충성을 이끌어내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어 전 세계로부터 IS에 가담하겠다는 자원자가 몰려들고 있는 기이한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IS는 외국인들을 참수하거나 화형에 처하는 등 밖으로 드러나는 잔인성보다도 자신들의 이념에 따르지 않는 무슬림을 포함한 이민족과 타 종파에 대하여 무차별 공격을 가하여 몰살시키는 인종청소를 벌이는 범죄적 행위를 일삼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이슬람 규율을 엄격하게 적용한다고 하면서도 그들은 점령지의 여성들을 무자비하게 성폭행하거나 노예로 파는 등 비윤리적 행동을 일삼고 합니다. 심지어 IS의 핵심지도부는 이슬람율법이 정하는 하루 다섯 번의 예배조차 드리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결국 그들이 주장하는 이슬람 규율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이념에 불과하다고 보이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중적 행태를 직시할 필요가 있는 이유입니다. <이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에서 그들의 정체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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