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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의 괴로움
오카자키 다케시 지음, 정수윤 옮김 / 정은문고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요즘이야 세부전공으로 나뉘는 추세이지만 처음 전공분야를 공부할 때는 모든 임상과목들을 커버할 수 있는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전공의 특성상 특히 컬러사진이 중요한데, 비싼 원서를 구할 수 없어 많이 어려웠었다는 선배님들 세대와는 달리 화질은 조금 떨어지지만 불법복사판 책이라도 저렴하게 공급되던 시절입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쥐꼬리만큼 되는 월급은 술값과 책값으로 남아나지 않았는데, 덕분에 남은 것이라고는 저질체력과 쌓여가는 책이었습니다. 책도 그림이 중요하기 때문에 무거운 아트지로 되어 있는 것들이 많아서 이사를 할라치면 엄청 힘이 들었습니다.
진료현장을 떠나면서도 언젠가는 돌아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그 많은 책들을 끌어안고 있다가 어느 해인가는 결단을 내려서 모두 버리고 말았습니다. 파지로 팔았더라면 적지 않은 돈이 되었을 터인데 지나고 보니 잘못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도 최근 몇 년 동안 책읽기에 열을 올리다 보니 사무실이나 집에 다시 책이 쌓여가고 있습니다. 책 사이로 길을 내야 하는 상황이 걱정되어 대책을 고민하다가 사무실 밖에 작은 도서실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4년이 지나고 보니 500여권 가까운 책을 같이 일하시는 분들과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에도 블로그 친구들과 나눈 책들도 만만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고도 남은 책이 천여 권은 넘는 것 같습니다. 이런 규모를 가지고 장서가를 운운한 처지는 아니지만 쌓여가는 책들로 중압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싶습니다.
남들은 이런 고민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해답을 얻기 위해서 읽게 된 책이 오카자키 다케시의 <장서의 괴로움>입니다. 비록 일본의 경우라서 저자가 인용하는 책들이나 그의 저자들 대부분을 알지 못하는 아쉬움을 건너뛰면 책을 가지고 있으면서 느꼈음직한 어려움을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제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헌책방을 통하여 책을 습관적으로 사들이고 고민하는 분들인 것 같습니다. 전공과 관련된 책을 사들일 때는 그렇지 않았지만, 전공이 아닌 도서의 경우는 제 손에 들어온 책들은 일단 모두 읽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의 관심분야가 아니면 바로바로 방출을 해왔다는 것입니다. 보유하기로 결정한 책들은 나름대로 기획하고 있는 책쓰기에 필요하거나, 칼럼 등을 쓸 때 참고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저자로부터 사인을 받은 책들은 기본적으로 보유하고 있습니다. 저도 몇 권의 책을 냈지만, 제가 사인을 해서 드린 책을 버린 분을 보면 저의 성의가 무시된 것 같아 공연히 화가 나는 편이라서 입니다.
헌책방을 순례하면서 사들인 책들을 다시 헌책방을 통하여 싼 값으로 파는 사람들의 사례를 장황하게 설명하는 저자를 보면서 왜 그렇게 사는지 정말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손님을 맞는 거실에 책장을 두고 화려한 장정의 전집들을 전시용으로 꽂아두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웃기는 짓이 조선시대에도 있었다는 것을 박철상님의 <서재에 살다; >에서 읽으면서 실없게 웃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결혼 전에 살던 집에 앵글로 만든 간이 책장을 사용했던 적이 있습니다. 밤에 자면서 책장이 넘어져 꽂아둔 책이 덮치지나 않을까 공연히 걱정한 적도 있습니다만, 지진이 많은 일본이라면 책장에서 쏟아진 책 때문에 부상을 당할 우려도 클 것 같습니다. 요즈음 우경화되고 있는 일본에 대하여 걱정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만, 제2차 세계대전을 끝막음하면서 원자폭탄이라는 가공할 무기를 사용한 것 때문에 전승국인 미국이 패전국인 일본에게 빚을 진 것 같은 느낌을 가졌던 것은 아닌지, 그리고 일본은 그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전쟁을 일으킨 원죄를 덮으려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 분위기는 이 책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미공군의 공습으로 귀중한 책들이 불타 사라진 사례들을 인용하면서 은근히 비난을 담은 듯한 느낌은 저의 오지랖일까요? 많은 책을 모아 연구를 하는 학자들이 전쟁 당시 공습으로 장서들이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면서도 안전한 곳에 책을 보관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을 지적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