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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헤르의 여인, 지나
타하르 벤 젤룬 지음, 조은섭 옮김 / 밝은세상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어떤 책에서 힌트를 얻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지금 마무리하고 있는 스페인-모로코-포르투갈 여행기에 삽입할 에피소드를 얻기 위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사실 모로코에서 스페인으로 건너가기 전날 탕헤르에서 하룻밤을 묵기는 했지만, 늦게 도착해서 저녁을 먹고는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서 배를 타러 간 것이 전부라서 탕헤르의 느낌이 전혀 없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타하르 벤 젤룬의 소설 <탕헤르의 여인, 지나>는 읽으면서도 무엇을 뒤쫓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그런 책읽기였던 것 같습니다. 책을 모두 읽은 뒤에 역자 후기를 읽고서야 소설에 담긴 저자의 의도를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지나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가 어머니의 태안에 자리하는 순간부터 태어나, 성장하는 과정에서 부딪힌 상처가 아물기까지의 과정을 다양하게 변주하고 있습니다.
주인공 지나(Zina)의 이름은 아름다움과 사생아를 의미하는데, 그녀는 기도, 양심의 점검과 침묵 속에서 묵상 이외에는 아무 짓도 해서는 안되는 실수의 밤에 어머니가 다섯 명의 노상강도에게 윤간을 당하여 수태한 아이였습니다. 그리고 출생하는 날에는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러 온 보호천사들의 저주를 받고 태어났던 것입니다. 그녀는 완전히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사랑받지 못한 삶을 살았던 존재들에게 둘러싸이면서 묘한 마력을 지니게 됩니다. 그녀 주변에 등장하는 남자들을 유혹하여 관계를 맺었다가도 무단히 관계를 끊어버리는 등, 성에 관한한 자유로운 행보를 보이던 그녀는 호주여자의 인도로 목매단 자의 오두막집에서 사내들에게 윤간을 당하기도 합니다.
저자는 한 팔이 잘린 타잔이라는 별명의 다만느와 치타라는 별명을 가진 아내 자밀라를 이야기꾼으로 등장시켜 지나에 관한 이야기를 천일야화처럼 풀어갑니다. 지나가 자신의 삶과 관련이 있다는 다섯 남자에게 복수를 하는 과정이 타잔과 치타의 입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전하는 방식으로 설명이 되는데, 전후 관계가 쉽게 정리되지는 않습니다. 그 남자들의 이름은, 바샤르, 비랄, 아비드, 카를로스 그리고 살림입니다.
지나는 부모가 돌아가시자 동쪽의 작은 산간 마을 샤우앙으로 옮겨가 셰리파라는 이름으로 아픈 사람을 치유하는 성스러운 길을 걷게 됩니다. 우랜 세월이 지나 살림이 셰리파를 찾아가 그녀와의 관계를 되돌리고자 하지만 그녀는 속세와의 인연을 끊었다는 말에 속절없이 탕헤르로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이렇게 소략하게 정리를 합니다만, 이야기의 갈래가 두서없이 전개되기도 합니다. 작가가 꿈을 꾸며 밤을 새우듯이 가상의 인물들과 대화를 하거나 이야기를 꾸며내 자신의 몽상으로 독자를 끌어들이듯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작가는 지나에게 모로코의 현재 모습이 겹쳐지도록 그려내고 있다는 설명입니다. 특히 탕헤르는 1920년대초부터 1930년대 후반까지 프랑스, 영국, 스페인, 이탈리아, 포루투갈의 다섯 나라에 휘둘린 국제적인 사생아였다는 것입니다. 탕헤르가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작가가 그려낸 지나는 다섯 명의 아버지와 다섯의 얼굴을 가진 여자로 성녀와 창녀의 이미지가 중복되는 다중인격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장과정에서 그녀가 겪는 종교와 섹스의 제의, 향락, 마약, 부패와 불법, 광기가 난무하는 현장들은 모로코의 현실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며, 온갖 비리와 성적 유희를 탐하면서 이슬람에 몰입하는 모로코 남성들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작가는 특히 억압받는 모로코 여성들이 종교와 관습의 속박에 저항하여 자유를 찾아가는 모습을 그려왔다고 합니다. 작가가 패스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다니던 열한 살에 탕헤르로 이사해서 프랑스 학제의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라바트에서 대학을 마쳤고, 지금은 프랑스에 정착하여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작가는 자신의 삶을 통하여 체험한 것들을 이야기에 담아 모로코의 암담한 현실을 바꾸어 보겠다는 의지를 작품에 담아내고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