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의 바람, 지상의 길 - 혜초의 길 서정시학 시인선 42
이승하 지음 / 서정시학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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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년 전 신라 성덕왕(또는 경덕왕) 때 스무살의 승려 혜초는 신라를 떠나 부처가 불법을 깨달은 천축국을 두루 순례하고 남긴 기록이 <왕오천축국전>입니다. 어쩌면 불도를 깨치기 위한 여행이었을 것입니다. 이승하 시인은 혜초의 길을 따라가며 시를 만들었습니다. 시인이 “밥 한 술 얻어먹을 수 있는 어느 담벼락 밑이면 / 나는 또 짚신 벗고 앉아 / 먹을 갈며 나 자신을 갈아야 한다.(혜초의 길 4, ‘사람을 만나 울다’의 마지막 연, 21쪽)”라고 노래한 것을 보면, 또한 나름의 도를 깨치기 위한 긴 여정이었을 것입니다. 시인이 2000년에 실크로드를 여행하면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되었다는 둔황의 막고굴을 지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천상의 바람, 지상의 길>에 해설을 쓴 송희복님이 “인간의 역사는 길로 시작되고 길로 뻗어 나아가고 길이 끊기고 길을 부활하는 과정을 무수히 반복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162쪽)”라고 한 것처럼 길은 인간의 삶이요 역사인 것입니다. 시인은 혜초의 길에서 지상의 길을 걷는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뒤쫓고 있습니다. 마치 그 옛날 혜초가 불도를 구하려고 고난의 길을 떠난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혜초의 길은 간단한 여행길이 아닌 것입니다. “영취산 올라가는 길은 돌로 된 산길 / 나무들 제멋대로 몸 비비꼬며 서 있고 / 산새들 재잘재잘 신이 나서 깝친다 / 어떤 나무는 죽은 채 땅에 박혀 있고 / 어떤 벌레는 죽은 채 땅 위에 나뒹군다(혜초의 길 6, ‘사이’의 두 번째 연의 일부, 24쪽)”라는 구절에서 보면 길에서 만난 모든 것들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가끔을 길 떠난 사람의 가슴 한 켠에 쌓이는 미묘한 느낌을 적은 부분은 공감이 가기도 합니다. “月夜瞻鄕路 浮雲颯颯歸 / 타향의 하늘에서도 이국의 하늘에서도 / 두둥실 떠 있던 원반형의 달 / 어머니 등에 업혀 쳐다보았던 달 / 사랑하는 사람 등에 없고 쳐다보았던 달 / 오늘밤 저 달은 한껏 발그레해지리라(혜초의 길 19, ‘달의 행로’의 두 번째 연, 52쪽)”에서는 지난 해 다녀온 스페인 여행 초반에 바르셀로나에서 지중해 위로 뜬 보름달을 바라보았을 때의 감정이 오롯이 되살아나게 됩니다. 시인은 때가 되면 나만을 기다리는 노모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노래했지만, 고향에서도 저를 기다려주실 부모님이 계시지 않으니 마음이 공허해지는 느낌입니다. “날이 밝았으니 자, 가세 / 새들은 벌써 둥지를 떠났네(혜초의 노래 27, ‘즐거운 여행의 첫연, 68쪽)”라고 노래하는 것을 보면, 도를 구하는 여행이라고 해서 힘들고 어려운 일만 있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시인은 꼭 1300년 전 혜초의 구도여행이나, 자신의 실크로드 여행에서만 시를 구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혜초가 지난 길에서 생긴 일이라면 최근에 생긴 사건에서도 시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이렇게 혜초가 지나간 길에서 얻어낸 시가 모두 61편이나 됩니다. 꼭 오천축국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길을 따라가다보면 비슷한 생각을 얻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내 재산 보시해서 쌓은 탑과 ‘ 남의 재산 약탁해서 쌓은 재산 / 세상의 불협화음 너무 일찍 알아 / 절간 문 닫아걸고 절 바깥으로 안 나간 / 최초의 세계인(世界人) 혜초여(혜초의 길 44, 마지막 연, 110쪽)”을 읽으면서 마드리드의 프라도미술관에 얽힌 이야기를 떠올립니다. 영국, 프랑스 등 세계적인 박물관들은 이력이 수상한 작품들을 다수 수장하고 있다고 합니다만, 프라도 미술관은 스페인이 잘 나가던 시절 왕실에서 구입한 작품들만 수장하고 있어 도덕성을 내세우고 있다고 들은 것과 시인의 노래가 너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프라도 미술관을 적을 때는 이 부분을 꼭 인용해서 언급하려고 합니다.

 

1755년 일어난 대지진과 해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는 리스본의 벨렝지구는 테주강이 대서양과 만나는 지점입니다. 벨렝지구에서는 ‘지상의 길은 / 바다에 이르면 죄다 끊어진다 / 회인한 여인의 자궁에 / 고통의 덩어리가 들어 있듯이 / 자연의 거대한 자궁인 바다/ 수많은 주검들의 무덤인 저 바다)혜초의 길38, 95-96쪽)’라고 노래하고, 뿐만 아니라 ‘길이 끝나는 곳에서 펼쳐지는 / 통증으로 울부짖는 바다를’로 마지막 연이 끝나고 있음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면 주머니에 넣어가서 한구절씩 씹어가며 읽어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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