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멍충한 - 기묘한 이야기에 담아낸 인간 본성의 아이러니
한승재 지음 / 열린책들 / 2015년 2월
평점 :
품절


오래전에 중국 무협소설이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무협소설에서는 백면서생이 기연으로 손에 넣은 무술비급을 연마하여 무림고수가 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무림비급이 내 손에는 들어오지 않나 생각하곤 했습니다. 세상을 살다보니 비급은 무술을 담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에게는 치매라는 질환의 병리소견을 담은 책이 비급이었습니다. 다만 너무 일찍 만나는 바람에, 아니면 끈기가 부족해서 제대로 꽃을 피워보지 못해서 아쉬울 뿐입니다.

 

비급에 대한 환상을 작품에 풀어놓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유명한 움베르토 에코 역시 <장미의 이름; http://blog.joins.com/yang412/12891200>에서 1968년 우연히 입수한 프랑스 사제 뱅자맹 발레가 불어로 번역한 아드송의 수기에 담긴 이야기를 뒤쫓고 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유명작가도 이럴진대 작가에 꿈을 두고 있는 분이라면 한번쯤은 생각해보았을 듯합니다. ‘비공인소설가’라는 프로필을 보면서 ‘뭐야?’하는 기분이 드는 한승재 작가는 건축 디자이너가 본업이면서도 글을 쓰는 분이라고 합니다. 자비출판도 불사하신다고 하는데, 저 역시 자비출판을 두어 차례 해보았지만, 웬만한 투지가 아니면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 유명한 프루스트 역시 <시간을 찾아서>의 첫 번째 에피소드를 자비로 출판했다고 하니, 자비출판은 작가가 자신을 알리는 방편도 되는 것 같습니다.

 

<엄청멍충한>은 한승재 작가가 열린책들과 계약을 맺고 세상에 내놓은 단편집이라고 합니다. 일단 작품성을 인정받았다는 이야기겠지요? 바로 <엄청멍충한>에서 작가는 무림의 비급이랄 기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프롤로그에서 그 비급을 얻은 과정을 소상하게 설명하였는데, 믿어야 되나 싶었습니다. 그 이유로 꼽을만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먼저 작가가 알지 못하는 이름의 나라를 여행하다가 배안에서 만난 니안(niian)이라는 사람이 완성한 이야기책을 건네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덟 편의 단편이 실린 <엄청멍충한>은 니안이라는 사람이 전해준 이야기책에서 뽑은 글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니안이라는 사람은 스페인어와 중국어를 섞은 듯한 이상한 말투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한국인인지 외국인인지를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군요. 작가께서 스페인어와 중국어를 이해하실 수 있기 때문에 3일 동안 이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니안이 건네준 이야기책은 우리말로 되어 있었을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여덟편의 단편 가운데 한국을 무대로 한 것이 분명한 작품도 있지만, 무대가 어디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것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무대가 어딘지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등장인물이 거의 다국적군이라고 할 정도이니까요.

 

소재가 참 기발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검은산’에서는 우리가 늘 타고 다니는 대중교통의 교통카드가 소재가 되었고, ‘지옥의 시스템’에서는 러닝머신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니 한승재 작가야말로 세렌딥의 세 왕자와 닮은 데가 많은 모양입니다.(맷 킹돈 지음, 세렌디피티; http://blog.joins.com/yang412/13612497) 소재가 기발하다보니 이야기 전개도 거침이 없습니다. 마음이 약한 임산부나 노약자는 고려해야 할 피가 튀는 잔혹한 장면도 사양하지 않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니안이라는 사람이 건넨 원고에 포함되어 있다고 했기 때문인지 이야기줄거리에 맞는 사진은 물론 간단한 스케치로 된 그림까지도 곁들여 읽는 이의 이해를 돕고 있기도 합니다. 기왕의 소설작품들에서는 볼 수 없는 점이기도 합니다.

 

이야기들은 하나 같이 놀랄만한 반전을 담고 있습니다. 그 반전의 의미를 깨치는 것이 쉽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결국은 많이 생각하면서 읽어야 한다는 것인데, 저 같이 별 생각없이 소설을 읽는 사람들에게는 부담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결정적인 반전은 ‘니안의 황당한 글을 옮기는 내내, 내가 그의 멍충한 짓에 휘말린 하수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287쪽)’라고 에필로그에 쓴 작가의 고백과 작가와 어떤 친분이 있어서 출간 전에 원고를 읽고 독후감까지 쓰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오호근님의 독후감에 등장하는 니안의 정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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