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 심청 - 사랑으로 죽다
방민호 지음 / 다산책방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우리의 고전을 현대적 의미로 재해석한 작품을 만나는 경우가 아주 드문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판소리 수궁가를 새롭게 해석한 방민호교수님의 <연인 심청>을 만나게 된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판소리 심청가는 물론이고, 책으로 된 심청전을 제대로 읽은 기억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아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당연히 심청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아버지 심봉사의 몫도 적지 않습니다. 딸을 낳다 죽은 아내를 대신하여 갖은 고생을 해가면 젖먹이를 키워낸 심봉사가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오다 개울에 빠지고 말았는데, 공교롭게도 심봉사를 구해준 것은 몽운사 화주승이었습니다. 화주승은 ‘세상을 다시 볼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객쩍은 신세타령을 하는 심봉사에게 공양미 삼백석이면 ‘눈을 뜰 수도’도 있다고 부축입니다. 그리고 보면 그 옛날에도 근거없는 의료행위를 하는 무면허 의사들이 도처에 숨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간사해서 공양미 삼백석에 눈을 뜰 수 있다는 허황한 희망을 품게 된 심봉사는 입이 가벼운 사람이었던지 딸 청이에게 전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청이는 임당수를 지나는 뱃사공들이 제물로 바칠 처녀를 산다는 도사공을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하고 제물로 사달라고 청합니다. 이리저리해서 청이는 임당수에 제물로 바쳐지고, 공양미로 바칠 삼백석을 얻은 심봉사는 몽운사에 시주를 하지만 눈은 떠지지 않습니다. 한편 임당수에 뛰어든 청이를 동해 용왕이 구해서 연꽃이 담아 세상으로 내보내고, 연꽃을 본 뱃사람들이 건져 왕궁에 바쳤다는 것이죠. 연꽃에서 나온 청이를 본 왕이 왕비로 삼았고, 청이는 아비를 걱정하여 맹인잔치를 열었는데, 잔치에서 만난 아비를 알아보고 부르는 바람에 놀란 심봉사가 눈을 뜨게 되었다는 행복한 결말에 이르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다 아는 우리의 고전을 그대로 적으면 읽어도 별다른 느낌이 없을 터인데, 작가는 우리가 아는 주요 등장인물에 조역을 대거 배치하고 있습니다. 열다섯 심청을 둘러싼 삼각관계 귀동이와 윤상이입니다. 귀동이 어머니가 청이네 집을 제집처럼 도와주지만 정작 청이의 마음은 건너 마을 장상서 댁의 서자인 윤상에게 끌리는 모양입니다. 외로운 처지가 비슷해서일까요? 부모보다는 사랑을 선택하는 요즈음 젊은이와는 달리 청이는 아버지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선택을 합니다. 사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생각이 복잡해졌습니다. ‘평생을 눈 못 보는 아비를 봉양해야 하는 자신의 신세에 절망하였기 때문은 아닐까?’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어려운 살림임에도 밥투정이나 하고 투전판을 기웃거리는 아버지를 둔 딸이라면 충분히 절망을 할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게다가, ‘너나 나나 아버지답지 않은 아버지 때문에 고생이구나’하는 윤상의 말이나, ‘오매불망 눈 뜨기를 원하는 아버지를 위해 자기를 송두리째 바칠 수 있다면, 그것은 부질없는 삶을 결말지을 수 있는 가장 값진 이가 되는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는 심청의 모습에서 유추하게 되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작가는 또 다른 장치를 두었습니다. 심청과 심봉사가 천계의 자미원에서 죄를 짓고 인간세계로 귀양온 몸으로 죄를 씻어야 하는 숙명이라는 점입니다. 청이는 심지어 죽음으로 아비를 봉양하는 모습으로 상제의 용서를 받게 되지만, 심봉사는 작가가 새롭게 투입한 계투요원 애랑이라는 창부에게 홀려 딸이 목숨과 바꾼 돈을 홀딱 빼앗기고, 그나마 남은 돈마저도 마무리투수 뺑덕어미에게 빼앗기고 빈털터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 심봉사의 모습을 보면서 도저히 구제받을 수 없는 바닥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아비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 청이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심봉사를 구원의 길로 안내하기 위하여 작가가 배치한 장치라는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청이의 영원한 보디가드 윤상은 구중궁궐에 숨겨진 암투의 희생양이 될 뻔한 청이를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칩니다. 청이는 윤상의 상여를 붙들고 “만약 사람이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 이렇듯 한 생애를 걸고서야 이룰 수 있는 것이라면, 이 생에 저에게 주어진 운명이란 오라버니를 사랑하고 그 사랑 속에서 행복을 얻음이 아니요, 앞 못 보고 어리석은 아비를 구하여 바른 길로 제도하는 그것이었나 봅니다.(386쪽)”라고 말합니다. 아무래도 작가는 사람은 미리 정해진 삶을 산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천계의 신이 인간 세상에 내려와 인간의 삶에 끼어들어 사건을 만들어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천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는 합니다만, 인간의 삶에 개입하는 모습은 별로 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어떻든 <연인 심청>이 계기가 되어 우리 고전을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한 작품들을 쉽게 만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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