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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설주의보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소낙눈이 내릴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듣고는 우산을 챙겨 출근했습니다. 가끔은 맞기도 하니까 말입니다. 겨울철에 운전을 하다가 생명이 오갈 정도의 사고를 두 차례나 당하고서는 눈이 내린다고 하면 외출을 삼가는 편입니다. 그런 대설주의보가 내려진 날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것인지 궁금해서 읽어보게 된 것입니다. 요즘 같은 겨울에 읽기 딱 좋겠다싶었습니다. 윤대녕의 <대설주의보>는 7편의 단편소설을 담은 소설집입니다. 표제작은 ‘대설주의보’는 최승호시인의 시집 <대설주의보>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제설차 한 대 올리 없는 산골에 소낙눈이 쏟아지는 정경을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 놓을 듯 /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이라고 표현하면서도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이라고 마무리하는 것으로 1980년대의 암울했던 시대적 상황을 담아냈다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설주의보가 내려진 날, 윤수와 해란이 차량통행마저 끊긴 백담사로 향하는 까닭이 어디에 있을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행히 해란은 백담사에 먼저 도착했지만, 조금 늦게 버스를 탄 윤수는 원통에서 그만 발이 묶입니다. 원통에서 길을 모색하면서 해란과의 만남을 돌아보게 됩니다. 취재차 찼았다는 일본 돗토리현의 사구에서 윤수가 목격한 일본인들의 모습이 충격적입니다. “사구 끝에서 일군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을 목격했어. 저마다 삿갓에 베옷을 입고 지팡이를 든 노인들이었지. 그들은 그림자처럼 묵묵히 해변을 따라 걷고 있었어. 저마다 얼굴을 감춘 채 말이야. (…) 옛날 일본인들은 죽음이 가까워지면 대개 여행을 떠났다고 해. 그중 한 부류는 벚꽃이 필 때 남쪽에서부터 열도를 따라 북쪽으로 계속 올라가는 거야. 벚꽃을 따라 벚꽃이 질 때까지 말이야. (…) 또 한 부류는 베옷을 입고 죽음이 찾아오는 바로 그 순간까지 무작정 걷는 거야. (…) 마치 죽음에 입문하듯이 말이야.(89쪽)”
그 여행을 마치고 공황 상태에 빠진 윤수를 위하여 친구가 미팅을 주선했고, 두 쌍은 식당을 거쳐 노래방까지 갔다고 헤어지면서 다시 연락을 해도 좋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렇게 만난 해란을 자기 집으로 데러가 재우고 해장국까지 끓여주면서 두 사람은 1년 가까이 만나다가 처음 만날 때 자리를 같이 했던 해란의 친구가 끼어들면서 오해가 생겨 헤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헤어진 해란과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해란을 이날 백담사에서 만나기로 한 사연이 담백하게 그려지게 되고, 여관을 잡고 날이 밝기를 기다리던 윤수는 기억의 흐름이 여기까지 미치면서 11시경에 여관문을 나서 백담사로 향합니다. 웃돈을 얹어주면서 백담사까지 가자고 사정을 해서 말입니다. 20분이면 갈 거리를 한 시간 걸려 백담사입구에 도착한 윤수는 눈덮인 산길 6킬로를 걸어서 올라갈 차비를 합니다. 어떤 절박함이 윤수를 이렇게 몰고 가는지... 그리고 해란 역시 스님을 졸라 차를 몰고 산을 내려오다 중간에 만나게 됩니다. 두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작가께서는 보여주지 않습니다. 잘 먹고 잘 살았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여기 실려 있는 다른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사랑이 개입되어 엮여지는 관계임에도 때로는 이들의 관계가 적절한가?하는 의문에, 왜 그랬을까? 하는 의문까지 생기게 됩니다. 하긴 교과서적인 평범한 삶이었다면 이야깃거리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보리’의 주인공 수경은 남자친구가 소개한 유부남과 일종의 계약 같은 사랑을 하다가 암을 얻으면서 관계를 정리하게 되고, ‘풀밭 위의 점심’은 대학시절 만난 두 남자와 한 여자의 교차하는 사랑이야기를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을 모티프로 하여 그리고 있습니다. ‘꿈은 사라지고의 역사’ 역시 삼촌과 조카가 한 여자와 나누는 엇갈린 사랑이야기입니다. ‘작가는 생의 불가항력에 직면한 인물들을 통해 생의 불가항력에 시달린 삶이 아무리 험난하더라도 삶은 끝내 숭고한 일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라고 출판사에서는 요약하고 있습니다만, 불가항력적인 사랑이었다는 등장인물들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