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정원 - 제4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박혜영 지음 / 다산책방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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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혼불문학상을 수상한 소설입니다. 읽어가면서 묘한 기시감이 드는 것은 최근에 개봉된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의 정원> 때문은 아닐 것 같습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홍차에 마들렌 과자를 적셔먹으면서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것처럼, 마담 프루스트가 그녀의 정원에서 키우는 작물을 먹으면 과거의 상처와 추억을 떠올리게 된다는 영화입니다. 작품의 무대가 되고 있는 동해안 어느 곳에 있는 유서 깊은 고택이라는 점과 등장인물 사이에 얽혀 있는 복잡한 관계가 드러나면서부터는 박경리선생님의 <토지>도 연상이 되었던 것도 기시감을 더해주었지만, 결정적인 것은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 제가 살아온 날들과 거의 비슷하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대여섯살 무렵 들판에 고립되어 있는 마을에 살던 저는 직직거리는 라디오 뉴스를 통해서 4.19혁명과 5.16군사혁명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다닐 때 시작한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고, 대학에 입학해서는 유신철폐 시위에 동참하기도 했습니다.

 

처음 읽을 적에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소설은 프루스트적으로 시작합니다. 오랜 세월 고향을 떠나있던 화자가 고향집 노관에 돌아오면서 본 풍경은 이렇습니다. “노관의 기와지붕 물매 사이로 해가 저물고 있었다. 뒤 언덕의 능선은 노란 복숭아 색으로 칠해지다가 어스름으로 경계를 지워나갔다. 나는 붓 끝에서 어둠이 묻어날 때까지 길 위에 그대로 서 있었다.(7쪽)” 커다란 세밀화를 그리듯 꼼꼼하게 사물을 묘사하는 프루스트와는 달리 한 폭의 작은 수채화를 그리듯 간결하게 그렸지만 화자의 고향집이 절로 눈앞에 떠오르게 만듭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서서 “불을 켰을 때 안채 대청에는 모든 것이 놀랄 만큼 제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쇠난로에 불을 피우자 낡은 연통의 이음새로 파란 연기가 새어나왔다. 데워진 공기는 대청마루의 들보 위를 돌아 바닥으로 내려왔다. 의자를 잇대어 길게 누우니 몸이 녹으면서 눈이 절로 감겼다.” 그리고는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마치 화자의 동복누이가 되는 이안이 시간여행을 예언한 것처럼 말입니다.

 

소설의 곳곳에 숨어있는 소품들, 예를 들면 영화 <벤허>와 <엔드리스 러브>, 라디오 드라마 <저 눈밭에 사슴이>, 동화 <소공녀>, <알프스 소녀 하이디>, <어린 왕자>, <백설공주> 등은 제목 뿐 아니라 개략적인 내용도 기억이 날 듯합니다. 그만큼 책읽기에 몰입할 수 있는 요소들이 풍부하다고 할까요? 다만 60년대에서부터 80년대에 이르기까지 장대한 세월을 한권분량으로 압축하다보니 책 읽는 이로 하여금 추정하도록 맡겨두는 부분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할머니-아버지-율이 삼촌-어머니-김경수의 죽음이 이어지면서 노관집 사람들 사이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인간관계는 시체말로 막장 드라마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작가께서는 어머니와 율이 삼촌 그리고 화자를 중심으로 현학적 분위기를 조성하여 막장 드라마라고 할 이야기를 지적이고 교양이 넘치는 비극적 스토리로 포장하고 있습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나서야 노관에 돌아온 율이 삼촌이 대학에 자리를 잡은 뒤에 고향집에 초대한 시인 손상기교수는 마르셀을 작가의 길로 인도하는 베르고트씨처럼 화자를 시의 세계로 인도하는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율이삼촌과 어머니 사이에 얽혀있는 오랜 비밀을 드러내는 역할을 맡기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요와 이안을 연결하는 가족관계에 더하여 김경수라는 공통분모를 더하는 역할까지도 맡기고 있는 것입니다.

 

47쪽에 달하는 이안의 편지는 세월의 흐름을 시사한다는 점 이외에도 화자와의 관계에 얽혀 있는 비밀을 고리를 암시하는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이안이 열여섯 살이 되는 날 백설공주 처럼 백 년 동안 잠에 빠질 것이라고 알리는 마지막 편지에서 ‘그러니 형제여, 잠에서 다시 깨어날 때까지 안녕(198쪽)’이라고 작별을 고하고 있어 이들이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라 출생의 비밀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정말 상상도 못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해도, 이 이야기의 핵심이 되는 인간관계의 비밀을 만들어낸 어머니의 기구한 삶이 가능할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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