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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읽는 러시아 - 러시아 문화와 조우하다
김은희 지음 / 이담북스 / 2014년 5월
평점 :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의 제임스 엘킨스 교수는 <그림과 눈물; http://blog.joins.com/yang412/12435742>에서 ‘당신은 그림 앞에서 울어본 적이 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림을 잘 모르는 저는 당연히 울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림을 보면서 울어본 사람이 있을까 싶었습니다만, 의외로 적지 않는 분들이 그림을 보다가 눈물을 쏟아낸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라치엘라 마게리니라고 하는 1979년 이탈리아 피렌체의 정신과 의사 는 예술작품을 감상하다가 갑자기 흥분상태에 빠지거나 호흡곤란, 우울증, 현기증, 전신마비 등의 증세를 보이는 환자에게 ‘스탕달 신드롬’이라는 진단을 붙였다고 합니다. 스탕달신드롬을 보면, 눈물을 흘리는 정도를 넘어서 격한 감정의 동요를 느끼는 분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스탕달이 <나폴리와 피렌체-밀라노에서 레조까지의 여행(1918년)>에서 ‘산타크로체 교회를 떠나는 순간 심장이 마구 뛰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 생명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고 걷는 동안 그대로 쓰러질 것 같았다.“라고 적은데서 스탕달 신드롬이라는 진단명이 탄생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스탕달 신드롬을 인용하는 것은 러시아 미술작품을 감상하면서 ‘스탕달 신드롬’을 자주 경험한 바 있다고 하는 김은희 교수님의 <그림으로 읽는 러시아>를 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소름이 끼치도록 사실적이면서도 섬세한 러시아 명화들을 감상하면서 그 명화들이 들려주는 러시아 이야기들에 또 한 번 감동받았고 그 이야기들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었다.”라는 것이 집필동기라고 합니다. 출판사에서는 ‘러시아 현대 미술사의 걸작을 통해 러시아의 자연, 풍속, 역사, 문학, 음악, 신앙, 민중 생활상 등을 해박한 지식으로 넘나들며 저 광활한 대지로 인도한다.’라고 간략한 소개에 그치고 있습니다.
김은희 교수님은 모스크바 국립 대학교에서 20세기 러시아 문학사를 전공하면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셨다고 합니다. 사실 그림을 감상하면서 기술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보다는 그림이 그려지던 당시의 사회적 배경이나, 화가의 삶에 관한 이야기들이 곁들여지면 더 쉽게 이해되는 것 같습니다. 마침 이 책에서는 저자가 그림을 설명하면서 당시 러시아 당대 일류 작가들의 문학작품을 인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림을 쉽게 이해되는 느낌입니다.
1991년 러시아의 고르바초프 대통령 시절 한국과 러시아가 수교를 맺기 전까지만 해도 러시아는 갈 수 없는 나라였습니다. 유럽을 다녀오면서도 혹시 모스코바에서 환승이라도 하게 되면 쉬쉬하던 사회적 분위기가 어제 같습니다. 아내는 지난 해 유럽 여행길에 잠시 들를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학, 음악, 발레 등 수준 높은 러시아 예술작품의 이야기를 익히 듣고 있으면서도 저에게 러시아는 여전히 먼 나라입니다. 그래도 언젠가는 가보고 싶은 나라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러시아의 사계와 러시아 사람들, 특히 러시아 여성의 삶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계절은 자연을 만들고, 자연은 명화를 만든다’라는 제목의 첫 번째 이야기는 러시아의 사 계절 분위기를 보여줍니다. 쿠스토디예프의 <마슬레니차>는 러시아의 봄맞이 축제인 ‘마슬레니차’를 화폭에 담았는데, 여전히 눈에 파묻혀 있는 마을에서 두툼한 겨울옷으로 감싼 러시아사람들이 다양한 놀이를 하는 모습을 담았습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봄이 먼 듯한 분위기입니다. 하지만 겨울을 막 지나면서 봄을 생각하는 입춘(立春)을 두고 있는 것처럼, 사랑방 작은 봉창을 통해서 눈 덮인 마당가에 꽃을 피운 매화를 바라보면서 봄을 읽었던 우리네 조상과 맥이 통하는 점이 있다 하겠습니다.
저자의 독특한 인문학적 그림읽기는 문학작품을 인용하기도 하지만, 다양한 러시아의 민속을 소개하기도 합니다. 앞서 예를 들었던 러시아의 봄맞이 축제인 마슬레니차의 경우처럼 러시아의 여름 풍경을 그린 시슈킨의 <모스크바 근교의 정오>에서는 여름의 가장 큰 축제로 하지와 연관된 ‘이반 쿠팔라의 날(구력 6월 24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날은 물과 불 그리고 풀과 관련된 의식과 풍습이 많다고 합니다. 특히 재미있는 풍습은 남녀의 사랑과 관련된 것으로, 이반 쿠팔라 전야에 아가씨들은 삼색 오랑캐꽃이나 우엉 등 여러 가지 풀로 만든 화관에 촛불의 세워서 강물이나 호수에 띄운다고 합니다. 화관이 바로 가라앉으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시집을 가지 못하며, 오래 떠내려갈수록 행복해지고 사랑이 이루어지며, 촛불이 오래 타면 장수한다고 믿는다고 합니다.
고백할 일은 저자가 소개하고 있는 작품들은 뛰어나다는 느낌은 들지만, 정작 작품을 그린 화가들의 이름 가운데 들어본 이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워낙이 그림에 아는 바가 없다고 해도 너무하다 싶습니다. 다행한 일은 저 같은 독자를 위하여 글의 말미에 화가들이나 본문에서 인용하신 인물들에 대하여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러시아적 분위기가 물씬 나는 그림을 보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같이 읽어나가다가 드디어 저도 잘 아는 그림을 만났습니다. 러시아 여성들의 사랑과 결혼을 주제로 한 두 번째 이야기에서 발견한 크람스코이의 <미지의 여인>입니다. 저자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을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여인의 모습은 매우 세련되고 감성적이지만, 무엇인가 편안한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갸름한 얼굴선, 약간 거무스름한 피부, 벨벳처럼 부드럽고 숱이 많은 눈썹, 오만하게 약간 내리뜬, 하지만 고독과 슬픔이 묻어 있는 촉촉한 갈색 눈, 또렷한 콧대와 콧방울, 아담하고 생기 있는 새초롬하게 다문 입술, 뒤로 가지런히 손질한 짙은 색의 머리, 다소곳하지만 꼿꼿한 앉음새. 어느 정도의 신분 또는 혈통에 근거한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에 익숙해진 원만한 여인에게서 나올 수 있는 약간의 오만한 표정. 무엇보다도 그 표정은 한 번 본 사람들에게 많은 상념을 불러일으킨다.(79~80쪽)”
이 그림은 민음사에서 나온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http://blog.joins.com/yang412/13076051>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페테르부르그 철도역에서 브론스키가 안나를 처음 만났을 때 느꼈다는 다음과 같은 인상과 흡사한 분위기일까요? “그의 옆을 지나치는 그녀의 사랑스러운 얼굴 표정에 유난히 상냥하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짙은 속눈썹 때문에 검게 보이는 그녀의 빛나는 회색 눈동자가 다정한 빛을 띠며 마치 그를 알기라도 하듯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 붉은 입술을 곡선 모양으로 만든 희미한 미소와 빛나는 눈동자 사이에서 차분한 생기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다녔다. 마치 그녀의 존재에서 어떤 것이 넘쳐흘러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반짝이는 눈빛과 미소로 나타나는 것 같았다.(톨스토이 지음, 안타 카레니나 1, 138쪽, 민음사 펴냄)” 김은희 교수님 역시 크람스코이가 마치 안나의 초상화를 그려낸 것처럼 느껴진다고 했습니다만, 저 역시 크람스코이의 <미지의 여인>에서 안나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래도 저자가 <안나 카레니나>에 끌려있는 것 같습니다. <미지의 여인> 말미에는 레핀의 그림 <경작하는 사람. 경작지의 레프 톨스토이>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안나 카레니나> 3부에서는 키티와 결혼한 레빈이 영지인 포크로프스코로 가서 살면서 그곳의 농부들과 같이 농삿일을 하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어쩌면 톨스토이의 자전적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만, 화가가 그림으로 남길 정도로 톨스토이가 농사일을 즐겼던 모양입니다.
러시아에서는 임신한 상태를 ‘흥미로운 상태에 있다’라고 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여인이 사랑하는 사람과 자신을 닮은 아이를 기다리는 일은 분명 가슴이 뛰도록 아름다운 일이겠습니다만, 여기 소개된 그림과 이야기는 오히려 애처롭거나 슬픈 이야기입니다. 페도토프의 <어린 과부>는 파산한 남편이 빚만 남기고 자살하는 바람에 임신한 채로 홀로된 여동생 류빈카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을 담으려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작 그림에서는 잔혹한 운명에 맞서는 고양된 정신성과 나약한 육체가 제대로 표현되지 못하고, 오히려 고통에 순응하여 녹아든 느낌이 강해서 정작 페도토프는 이 그림에 만족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밖에도 농노의 초야권을 가지고 있던 러시아 귀족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그려낸 폴레노프의 <나리의 권리>나 앞서 소개한 페도토프의 <소령의 구혼>, 푸키레프의 <어울리지 않는 결혼> 등은 당시 러시아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작품들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이야기는 러시아 사람들의 음식, 교육 그리고 삶과 죽음이 주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푸쉬긴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제목으로 정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얼큰히 취한 남편이 선술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아이와 함께 온몸으로 막고 있는 아내의 모습을 담은 마콥스키의 <못 들여보내요!>에서 오래 전의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면서도 술을 끊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러시아’ 하면 ‘보드카’가 떠오릅니다. 구 소련의 지식인들은 “그 당시 술은 유행이었다. 아마 유행이었다기보다는 일종의 ‘반체제 운동’이자 현실 극복의 독특한 시도”였다고 술회한다고 합니다. 즉 술은 러시아 사람들에게는 현실에 대한 일종의 탈출구였다는 것인데, 우리 역시 그런 시절이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술을 마시기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가장 슬플 것이라고 생각되는 세월호 침몰사고의 유족들이 읽으면 좋을 것 같은 내용도 있습니다. ‘위로할 수 없는 슬픔’이라는 제목의 글입니다(198쪽). “위안을 받으려 하지 마시오. 당신이 필요한 것은 위로가 아니오. 위안을 받으려 하지 말고 우십시오……. 그리고 오랫동안 당신은 위대한 어머니의 통곡을 계속할 것이오. 하지만 결국 그것은 당신에게 조용한 기쁨으로 변하게 될 것이고, 당신의 쓰라린 눈물은 사람을 죄악에서 구하는 연민과 정화의 눈물이 될 것이요. 그리고 나는 평온 속에 잠자는 그대의 어린아이를 기억할 것이오.”라는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조시마 장로가 세 살배기 아이를 잃고 통곡하는 마부 아내에게 건넨 위로의 말을 저자는 인용하였습니다. 도스토옙스키가 이 작품을 집필하는 동안 세 살배기 아들 알료샤를 잃었다고 합니다. 그때 암브로시 장로가 도스토옙스키에게 건넨 위로의 말을 작품에 옮겨놓았다고 합니다.
크람스코이의 <위로할 수 없는 슬픔>은 역시 두 아들을 잃은 화가의 아픔이 녹아있는 작품으로 화가는 슬픔에 젖은 어머니의 모습을 처음에는 앉아있는 것으로, 두 번째는 바닥에 내려앉은 모습으로, 마지막에는 이 책에 실려 있는 입에 손수건을 문 채 서 있는 모습으로 그렸다고 합니다. 저자는 그림을 통하여 슬픔을 극복하고 살아가는 생명들의 힘과 의지를 나타내려고 했던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손수건을 입에 물고 슬픔을 참아내는 어머니의 모습이나, 영구대 밑에 놓인 화분 속 튤립의 붉은색이 생명력을 강하게 나타내며, 연약해 보이는 줄기도 하늘을 향해 곧게 뻗는 모습이 힘을 느끼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세월호 침몰로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유족들께서도 이제는 몸과 마음을 추슬러서 힘차게 살아갈 준비를 하시면 어떨까싶습니다.
그리고 레핀의 <볼가강의 인부들>입니다. 16~19세기 말까지 증기선이 등장하기 전까지 유럽의 많은 강과 운하에서는 물살을 거슬러 범선을 끌어올리는 인부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순풍이라고 불편 돛을 올려 예인을 쉽게 할 수 있지만, 역풍이라도 불면 그만큼 힘이 더 들었다고 합니다. “어기여차, 어기여차, 한 번 더, 한 번 더...”라고 시작하는 러시아 민요 <볼가 강의 뱃노래>는 처음 배를 끌어내는 가장 힘든 순간에 인부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하여 부르던 노래였다고 합니다. 그 장엄한 노래를 한 번 들어보시면 어떨까요?
이 책의 마지막 작품은 책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기도 한 야로센코의 <어디나 삶>입니다. 어디론가 떠나려는 낡은 열차의 죄수 칸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창밖에 모여드는 비둘기에게 흑빵부스러기를 던져주는 모습을 담았습니다. 이 그림은 작가의 설명이 없었더라면 의미를 제대로 깨닫기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그림을 구성하는 열차, 비둘기 그리고 사람들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읽기를 마치면 그때는 저자처럼 가슴이 먹먹해지는 느낌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