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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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나라가 슬픔에 잠겨 기도하는 심정으로 한 주일을 보내는 가운데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실종된 탑승객들이 환하게 웃으며 돌아오는 모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만, 인재로 밝혀진 무수한 사건 사고들이 반복되고 있음에도 여전히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안전한 사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분명하지 않습니다만, 아마도 극단 ‘산울림’이던가 무대에 올린 <고도를 기다리며>를 처음 본 것이 70년대 중반, 그러니까 대학 연극반에서 동아리활동을 할 무렵이었던 것 같습니다. 전통 희극을 많이 무대에 올리던 터라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면서 꽤나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베케트는 1906년 아일랜드 더블린 근교의 유복한 신교도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초등학교에서 프랑스어를 익혔고, 트리니티 대학에서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를 전공할 정도로 어학에 재능을 보였다고 합니다. 1933년 부친 사망 이후 유럽을 방랑하다가 1937년 파리에 정착했는데, 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숨어서 레지스탕스운동을 돕는 한편 작품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베케트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바로 1953년 무대에 올려진 <고도를 기다리며>가 성공리에 무대에 올려지면서부터라고 합니다. 영국의 연극학자 마틴 에슬린이 ‘반연극’ 또는 ‘부조리 연극’이라는 새로운 연극사조의 등장을 알리면서 헤럴드 핀터, 에드워드 올비 등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무대에서 이 작품을 처음 만났을 때 저 역시 ‘고도’가 신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지난 이제 희곡으로 만난 ‘고도’는 무엇이든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즉 지금 이 순간은 앞서도 말씀드렸던 결코 올 것 같지 않은 안전한 사회를 기다리는 일 같은 것 말입니다. 한적한 시골길에 서 있는 한 그루 앙상한 나무 아래서 블라드미르와 에스트라공이라는 두 방랑자가 의미 없는 말을 주고받다가 이제 그만 떠나자는 말이 나오면서 이들이 ‘고도’라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떠날 생각을 접고 다시 기다리는 사이에 포조와 그 종자인 럭키가 등장하는데 그들도 고도가 아닙니다. 네 사람이 뒤엉켜 또다시 의미없는 말을 한바탕 주고받다가 포조와 럭키가 떠난 다음에 소년이 등장합니다. 소년이 모습을 나타낼 때 에스타라공이 ‘또 시작이구나’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서 두 사람이 고도를 기다린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어제 오늘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닌 것이 분명해집니다. 하지만 블라디미르가 ‘너 어제도 오지 않았니?’라고 물었을 때, 처음 온 것이라고 답변하는 것을 보면 애매해지는 부분도 있지만, 두 사람이 오랫동안 고도를 기다려온 것이 분명합니다.

 

1막과 2막으로 구성된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역시 시골길에 서있는 나무 아래서 두 사람이 만나 고도를 기다리다가 해질 무렵이면 잠자리를 찾아 떠났다가 다음날 이곳에서 다시 만난다는 기본구조에 변함이 없는 것으로 보아 3막이 있다면 역시 같은 일이 반복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구조를 가진 영화가 있습니다. 해롤드 래미스 감독이 1993년에 발표한 <사랑의 블랙홀>입니다. 원제목 ‘Groundhog day’는 우리나라의 입춘에 해당하는 날로서 봄맞이 축제가 열리는 펜실베니아 펑츠토니에 나간 기상캐스터가 폭설로 도시에 갇히면서 아침에 일어나면 어제와 꼭 같은 일이 반복되는, 즉 시간의 쳇바퀴에 갇히는 상황을 만나게 됩니다. 절망하던 주인공은 결국 반복되는 하루를 이용해서 자신의 계발하고, 남을 도와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실행에 옮기면서 영원히 반복될 것 같던 시간의 쳇바퀴를 벗어나게 됩니다. 그때는 날짜만 바뀐 것이 아니라 자신도 바뀌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양한 재능을 가지고 있고 남을 섬기는 만인의 친구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도를 기다리며>의 두 주인공에게는 변화가 생기게 될까요? 1막에서는 앙상하던 나뭇가지가 잎으로 뒤덮여 있고, 포조와 럭키의 관계에도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는데, ‘그럼 갈까’라고 말하는 블라드미르에게 에스트라공이 ‘가자’라고 대답하면서도 ‘둘은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라는 지문을 남겨놓은 것을 보면, 두 사람은 여전히 고도만 기다리고 있을 것 같습니다.

 

옛날 <고도를 기다리며>의 무대에서 등장인물들의 우스꽝스러운 몸짓이 연출의 의도에 따른 것으로 이해했는데, 희곡을 읽어보니 대부분 작가가 지문으로 지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마틴 에슬린이 말하듯 작가가 만들어낸 비극 속의 희극을, 동시에 희극 속의 비극을 통해서 우리들의 삶의 의미를 새겨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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