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란 무엇인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정명환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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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현실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작가들이 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르트르의 <문학은 무엇인가>를 읽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이 책을 번역하신 정명환교수께서 작품해설을 통하여, 이 책은 “이른바 문학의 사명이 정치적, 사회적 현실을 변혁하기 위한 <참여>에 있다는 것을 원론적으로 주장하고, 그 이후로 사르트르라는 이름은 <참여문학A>이라는 개념과 불가분의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417쪽)”라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사르트르의 자기변명에 불과하다는 독자의 리뷰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나름대로의 철학을 내세운 사르트르와는 달리 우리나라에서 정치에 참여하는 작가들 가운데 자신의 소신을 밝힌 분은 별로 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사르트르는 서문을 통하여 “비평가들이 문학이라는 말을 무슨 뜻으로 쓰는지 전혀 밝히지도 않고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단죄한 이상, 그들에 대한 최상의 대답은 글쓰기의 예술을 편견 없이 검토해 보는 것(10쪽)”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왜 쓰는가?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라는 스스로에게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적어간 본 것이라고 합니다. 이어서 사르트르 시대의 불란서 문학계의 분위기를 정리하고 있는 자신이 글쓰기를 통하여 정치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독자에게 강변하기 위함으로 보입니다.

 

작가는 회화나 조각 그리고 음악과 같은 예술분야와는 달리 문학은 읽는 이의 감정을 이끌어 인도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작가는 오막살이 한 채를 묘사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거기에서 사회적 부정의 상징을 보게 하고 독자의 분노를 자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화가는 말이 없다. 화가는 다만 <하나의> 오막살이를 보여줄 따름이다.(15쪽)” 이점에 대해서는 공감이 가는 것 같습니다. 말로써 생각을 전하는데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있지만 글이라는 매체는 이런 제약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사르트르의 답변은 이렇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글쓰기란 하나의 기도(企圖)이다. 작가는 죽기에 앞서 살아 있는 인간이다. 우리는 책을 통해서 우리의 정당성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록 먼 훗날 우리가 과오를 저질렀다는 판정이 내린다 해도 미리부터 과오를 두려워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48쪽)” 이 점에 대해서는 글쓰기 전에 편향된 사고를 배제하고 자신의 판단이 타당한가를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작가는 저마다의 이유로 예술을 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예술은 도피이며, 다른 사람에게는 정복의 수단인 것처럼 글쓰기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예술적 창조의 주된 동기의 하나는 분명히 세계에 대하여 우리 자신의 존재가 본질적이라고 느끼려는 욕망(59쪽)”이기 때문에 그런 욕망을 해소하기 위하여 창작에 나선 것이고 참여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작가는 독자에게 어떤 느낌을 주려고 글을 쓰는 것인데, 여기에서 사르트르의 독특한 독자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책을 읽을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일 수도 있습니다. 읽기를 창조적 행위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읽기를 통하여 나름대로의 해석을 창조해내는 적극적 행위로서의 읽기를 주장한 것입니다. 다만 독자의 창조적 행위를 인정한다면 읽기가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맺어진 고매성의 협약’이라는 전제를 둔 것은 지나치게 작가의 입장에 붙들린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서로가 상대방을 신뢰하고, 상대방에게 기대하고, 자기 자신에게 요구하는 만큼 상대방에게도 요구한다.(80쪽)”라는 작가의 생각은 읽는 이가 작가의 생각에 따라주기를 강요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읽는 이도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서 작가를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번역자 역시 각주를 통하여 창조의 의의와 읽기의 과정을 논하는데 있어 자유의 문제를 넘어 현실적 세계의 변혁과 결부된 자유의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는 작가의 생각이 꼬이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결국 ‘무엇을 위한 글쓰기인가?’하는 문제는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라는 질문과 연결되어 있다고 정리하고 있는데, 작가는 이전 시대의 작가들과 독자들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당시 프랑스 문학계가 프롤레타리아 역시 독자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주 독자층인 부르주아지들을 대상으로 한 글쓰기를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비판하면서, 19세기를 과오와 실추의 시대였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이 시도한 분석이 매우 편파적이며 이론(異論)의 여지가 있음을 인정한다는 식으로 빠져나갈 장치를 마련해두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현실정치 참여가 어쩔 수밖에 없다는 점을 독자에게 납득시키고자 방대한 지면을 할애하여 1947년의 프랑스 작가들의 상황을 분석하는 글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어떤 독자도 지적했습니다만, 옮긴이의 작품해설은 이 책을 읽는데 좋은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옮긴이는 사르트르의 현실정치 참여는 부르주아지의 억압적 체제를 거부해야 하는 동시에 스탈린의 노선에 맹종하는 공산당의 교조주의를 규탄하는 양비론적 시각을 깔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사르트르가 문학의 참여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취한 담론적 전술의 실체를 파악하고, 그가 과연 그것에 충실했는지를 다른 텍스트와 비교해보는 것이 좋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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