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철학의 새로운 방법론이라 할 현상학을 창시한 것으로 알고 있는 에드문트 후설을 공부하러 선뜻 나서지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후설의 철학은 난해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어서 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후설의 철학을 전공하신 박인철교수님께서 보다 많은 대중들에게, 보다 객관적으로 후설의 철학을 이해시켜 보자는 취지로 ‘좀 더 쉽게 풀어보자’라고 시작한 <에드문트 후설>을 읽고 난 느낌은 역시 ‘후설의 철학은 어렵다’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살았던 독일에서도 후설은 그의 제자 하이데거보다도 덜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후설은 버트런드 러셀처럼 수학자로 출발했다고 합니다. 수학이 지니는 학문적 엄밀성과 정밀성의 영향을 받은 그의 철학적 사유는 이 책을 지은 저자가 ‘엄밀한 학문성에 의한 철학의 개혁’이라는 부제로 잘 요약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수학자 후설이 철학자로 방향을 바꾼 것은 1884년부터 1886년까지 빈대학에서 브렌타노의 강의를 듣고, 철학도 수학처럼 하나의 엄밀한 학문성을 갖출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얻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철학이 엄밀한 학문으로 자리매김하려면 기본적으로 어떤 편견이나 사심에 의해 이끌림 없이, 또한 확증되지 않은 어떠한 전제에도 기반을 두지 않는, 이른바 ‘무전제성의 원리’에 부합해야 한다(7쪽)라고 보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서양철학의 오랜 전통이 되어온 객관주의가 일종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인데, 일상적으로 믿고 있는 존재에 대한 믿음이 철학적 지식이 되려면 별도의 철학적 정당화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객관주의에 물든 전통철학은 이런 과정을 생략하고 있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철학의 진정한 방법은 자연과학의 방법에 다름 아니다.(15쪽)”라고 한 브렌타노의 영향과 당시에 막 등장한 심리학에 눈을 뜬 후설은 수학적 개념을 심리적인 작용에 근거해 심리학적으로 해명하고자 시도하였고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지만, 심리학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1901년에 쓴 <논리연구 II>에서 자신의 철학을 현상학으로 규정하면서 이를 ‘기술적 심리학’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현상학이라는 용어는 이미 1764년 람베르트의 저서에서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후설은 현상학의 개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현상학은 기술심리학이다. 따라서 인식비판은 본질적으로 심리학이거나 최소한 오직 심리학의 토대위에 구축되어야만 한다.(…) 일체의 이론적-심리학적인 관심을 떠나 인식체험을 단지 순수하게 기술하면서 탐구한 것을 경험적 해명과 발생을 지향하는 본래적인 심리학적인 탐구와 구분하는 것은 인식론적으로매우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우리는 인식체험에 대한 순수 기술적 탐구를 기술적 심리학 대신 현상학이라고 말하면 좋을 것이다.(19~20쪽)”
<논리연구 II>를 통하여 후설은 현상학의 성격과 이념을 규정하게 될 세 가지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하는데, 첫째는, 현상학적 태도와 관련해 현상학은 최대한 있는 그대로의 존재 그 자체를 받아들인다는 열린 태도의 성격을 보여주고, 둘째는, 현상학의 출발점이자 주된 탐구대상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는데, 바로 의식체험의 현상학의 주된 탐구영역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셋째는, 후설의 현상학은 인식론적 탐구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점입니다.(21~22쪽)
그런데 후설은 1913년에 출간된 <이념들 I>에서는 <논리연구>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의식개념, 즉 ‘절대적 초월론적 의식’개념을 등장시키면서 이 의식이 외적 세계에 대해 독립적임과 동시에 근원적이라는 주장을 내놓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의식의 우선성 주장을 바탕으로 초월론적 의식에 의해 세계가 규정된다는, 이른바 ‘관념론적’ 세계관이 모습을 드러내고, 점점 이를 강화해갔다는 것입니다. 처음 출발할 때는 심리학적인 혹은 객관주의적 색채를 가지던 그의 사유가 극단화된 주관주의적 차원으로 전개된 것으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외관상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현상학에 대한 후설의 근본적 대도와 방향성은 변함이 없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후설의 관념론적 세계관을 자칫 존재론적, 실체적인 관점에서 의식을 신격화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면 의식이 세계의 창조자인 것으로 인식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