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 한국사 : 16세기, 성리학 유토피아 - 조선 2 민음 한국사 2
한명기 외 지음, 문사철 엮음 / 민음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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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의 기틀을 다진 15세기에 이어진 16세기에 조선왕조는 두 차례의 큰 위기를 맞게 된다고 합니다. 그 첫 번째 위기는 16세기의 벽두를 흔든 연산군의 폭정(1494~1506 재위)입니다. 중국의 역사를 보면 황제의 폭정은 왕조의 몰락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던 것인데, 조선왕조는 이 위기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을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민음한국사 <16세기, 성리학 유토피아>의 서에서는 명군 세종의 핏줄을 이었을 것으로 믿기 어려울 정도로 살육극을 펼친 연산군에 대항하여 사대부들이 선택한 길은 왕조의 철폐가 아니라 왕조는 유지하면서도 임금을 바꾸는 반정 카드를 선택한 것이 왕조가 위기를 넘기는 기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즘말로 치면 직업관료라고 할 사대부들이 수명이 다했다고 볼 수도 있는 왕조를 연명하도 한 것은 조선왕조를 세운 철학적 배경이 된 성리학이 한 가지 요인이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성리학은) 왕권을 뒷받침하는 도구인 동시에 사대부가 왕권을 제약하며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게 할 도구이기도 했다. 연산군을 쫓아낸 사대부들은 굳이 새로운 왕조나 귀족 공화국을 세울 필요 없이 조선 왕조를 이용해 그들의 세상을 열어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조선사회의 특성이 그와 같은 선택을 하도록 이끌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성리학은 정작 처음 시작한 중국에서는 그 한계를 논하는 양명학이 등장하여 위기를 맞기도 하였는데, 조선에서는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모든 권력이 황제에 집중되는 권력구조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조선에서는 이러한 군주제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군주가 성리학의 이념을 바탕으로 권력을 사대부들과 공유함으로써 군주제의 문제를 피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리학의 가르침을 이어받고 연구하는 기관으로 설립된 서원을 중심으로 입지를 확보하게 된 사림들이 성리학적 가치를 극대화하기에 이르렀고, 성리학은 우주의 원리를 논하기에 이르는 등, 중국에서 시작한 성리학은 조선에서 꽃을 피우게 된 것이라 합니다.

 

조선 왕조가 16세기에 맞은 두 번째 위기는 세기말에 일어난 임진왜란입니다. 어쩌면 태풍에 실패하기는 했지만, 원나라 시절에 조선과 합동작전으로 벌였던 일본정벌 이후에 벌어진 동아시아지역에서 일어난 두 번째 국제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말씀드리는 국제전이라는 의미는 3개 국가 이상이 전쟁에 참여한 것으로 친다면 말입니다. 그 전에는 삼국시대에 수나라와 고구려, 당나라와 고구려 사이의 벌어진 국소전이나,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왜군이 백제를 도와 연합군에 대항한 것을 국제 전쟁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 정도로 대규모였는지는 분명치 않아 제외한다면 말입니다.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한 왜군에 압록강까지 일방적으로 밀려났던 조성왕조가 되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이순신 장군이라고 하는 걸출한 무장이 왜군의 북상을 남해안에서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있었던 것과 각 지역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활약으로 보급선이 늘어난 왜군을 곤경에 빠트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진년 시작한 전쟁이 정유년에 다시 불붙어 마무리되기까지 왜와 명나라 사이에 진행된 협상 테이블에 조선의 자리는 없었다는 것이 불행한 일이었지만, 왜가 물러나면서 조선은 한 세기에 생긴 두 차례의 위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전말을 소상하게 분석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왜란의 경과와 의미를 다시 정리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사색당쟁으로 조선의 정치구조가 무너져내렸다고만 알아왔던 부분에 대하여도 조선의 사대부들이 만들어낸 붕당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읽을 수 있습니다. “1583년을 즈음해 조성에는 학통, 학문적 입장, 그리고 지역적 기반에서 상반되는 두 개의 붕당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 두 개의 붕당은 그 출현에서도 보았듯이 사림정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고, 사림 정치라는 공동의 목표를 지향하면서 공론에 따라 서로 비판하고 견제하며 국정 운영의 동반자가 되었다. (…) 중국에서 같은 시기에 붕당이 거의 기능하지 못한 것과 비교해 본다면, 조선이 선택한 길은 왕정 체제에서 신하들의 참여를 극대화함으로써 왕정의 효율을 높이는 방법이었다.(187쪽)”

 

이처럼 민음한국사는 지금까지의 우리역사 해석방식과는 차별화된 관점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세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기다려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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