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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축복이 있기를, 닥터 키보키언
커트 보네거트 지음, 김한영 옮김, 이강훈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1월
평점 :
품절
절판이 되어 아직까지도 구하지 못하고 있는 <고양이 요람>의 저자로 알고 있는 커트 보네거트를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2007년 4월 11일 생을 마감한 미국 최고의 풍자가이자 휴머니스트이며,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라고 소개되어 큰 기대를 품고 책을 읽었습니다.
<신의 축복이 있기를, 닥터 키보키언>은 저자가 1999년에 내놓은 에세이집인데 2011년에 번역이 되었으니 소개가 늦은 셈입니다. 별도 설명은 없습니다만, 닐 게이먼(아마도 영국의 소설가일 듯합니다만)이 2010년 9월에 쓴 서문이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보네거트 사후에 나온 것을 저본으로 번역이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보네거트의 <타이탄의 미녀>, <고양이 요람>, <제5도살장> 등을 어렸을 적에 읽고 사랑하게 되었고, 나아가 많은 것을 배웠다고 밝힌 그는 기자로 일할 때 보네거트를 인터뷰하려고 했지만 피곤하다는 이유로 거절당하는 바람에 생전에 보네거트를 만날 수는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런 그가 책의 서문을 쓰기 위하여 저자의 방식대로 사후의 만남을 통하여 대화하는 형식을 취하는 독특한 발상을 해낸 것 같습니다. “커트 보네거트는 천국의 황금아치 밖으로 나와 완벽하게 다듬어진 잔디밭에서 풀을 깍고 있었다. ‘사후의 만남을 다룬 선생님의 책에 대해 인터뷰하러 왔습니다.’ 내가 말했다. (…) ‘솔직히 별로 내키지 않는군’ 그는 말하며 내 표정을 살폈다. ‘이보게, 자네 좋을 대로 쓰게나. 난 죽었으니 상관하지 않겠네.’(6~7쪽)”
닐 게이먼이 서문에 썼듯이 보네거트는 임사체험이라는 방식을 통하여 사후의 세계로 들어가 이미 죽은 사람들을 인터뷰한 결과를 써냈습니다. 그 가운데는 셰익스피어와 아돌프 히틀러, 아이작 뉴턴과 같은 유명인사들도 있습니다만, 우리에게는 생소한 인물들도 적지 않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작가가 사후세계로 들어가는 작업이 텍사스 헌츠빌에 있는 주립교도소의 독극물주사 사형실이라는 점과 시술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위험을 통제하기 위하여 잭 키보키언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혹시 이 책을 읽는 독자 가운데 임사체험을 따라하려는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려한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서문에 적은 “천국의 문을 통과한다는 것은, 내가 어렵사리 깨달은 것처럼, 그쪽에 있는 인터뷰 대상자가 아무리 매혹적이라도 변덕스러운 성 베드로가 기분에 따라 다시 내보내주지 않을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다. 이를테면 당신이 나폴레옹과 애기를 나누기 위해 천국의 문을 넘으면 당신의 친구와 친척이 얼마나 비통해할지 생각해보라. 사실상 그것은 자살행위와 마찬가지니까.(13쪽)라는 구절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잭 키보키언은 알츠하이머병 등과 같이 회생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 환자들의 요청에 따라 그가 발명한 자살장치를 제공하여 죽음의 의사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1990년 최초 시술 이후에 살인죄로 기소되었지만 무죄판결을 받아낸 이래 1998년까지 무려 130여명의 환자를 죽음의 세계로 안내했습니다. 결국 1999년 2급 살인 혐의가 인정되어 징역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키보키언은 이 책의 무대가 된 헌츠빌 주립교도소가 아닌 미시간 주 콜드워터 레이크랜드 교도소에 수감되어 8년 6개월간 복역한 다음에 2007년 더 이상 안락사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가석방되었다가 2011년 6월 3일 숨을 거두었습니다(http://blog.joins.com/yang412/12239880).
보네거트는 뉴욕의 라디오방송국 WNYC에서 방송하기 위하여 녹음한 것이라고 전제하긴 했습니다만, 사후의 세계에 만난 사람과 나눈 이야기들을 녹음할 수 있는가 하는 부분에서는 다소 헷갈리는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인터뷰이들과 나눈 이야기들이 때로는 가슴을 울리는 내용을 담기도 하지만, 때로는 요즘말로 돌직구같은 엉뚱한 질문을 던지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셰익스피어를 만나서는 그에게 사람들이 그의 작품으로 생각하는 모든 희곡과 시를 직접 썼느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성 베드로에게 물어봐!(80쪽)”라고 답했다고 했습니다.
저자는 사후세계에서 이루어진 죽은 이들과의 짤막한 인터뷰들은 다시 현세의 삶을 되돌아보는 방식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독특한 형식이지만 닐 게이먼이 서문을 마무리하면서 던진 “인생의 목적은, 누가 그것을 지배하든 주변의 사랑할 만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7쪽)”라는 말로 대변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105쪽의 짧은 이야기이지만 많은 생각거리를 남기는 책읽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