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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사물들
장석주 지음 / 동녘 / 2013년 4월
평점 :
버트런드 러셀은 <철학이란 무엇인가; http://blog.joins.com/yang412/13128465>에서 ‘현상(現狀)과 실재(實在)’를 구분하는 방법, 즉 “사물이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것과 사물이 사실상은 무엇인가?”하는 질문이 철학적 사유의 출발점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물에서 철학공부를 시작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 셈 입니다. 장석주교수님의 <철학자의 사물들>은 그 실제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권성우교수님은 발문에서 “<철학자의 사물들>은 제목 그대로 우리 주변에 가까이 존재하는 서른 개의 사물을 각기 서른 명의 철학자(사상가)의 문제의식과 절묘하게 연계시켜 설명하는 일종의 철학적 에세이라고 할 수 있다(273쪽). (…) <철학자의 사물들>은 장석주의 박람강기로 표현할 수 있는 드넓은 지식, 다양한 사물들에 대한 면밀한 관찰력, 인간의 욕망과 행위를 투시하는 혜안을 엿볼 수 있는 충분히 개성적인 에세이라고 할 수 있다. (…) 그 사물들의 존재와 특성 그리고 이에 연계된 인간의 실존을 걸출한 철학자들의 독창적인 사유와 연계시켜 해석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철학적 사물들>은 로제 폴 드르와의 <사물들과 철학하기>의 심화이자 확대라고 할 수 있겠다.(275~276쪽)” 그러니까 아직 읽지는 못했습니다만, 드르와의 <사물들과 철학하기>를 벤치마킹한 글쓰기였던가 봅니다.
어떻든 재미있습니다. 관계, 취향, 일상, 기쁨, 이동 이라는 다섯 개의 키워드에 상응하는 서른 가지의 사물이 사유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특별한 원칙이나 규범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만 저자는 이 사물들이 이끈 그 사유 안에서 삶과 죽음, 주체와 타자, 꿈과 기대, 욕망과 무의식, 기호와 교환 따위에 대해 묻고 대답하려 했는데, 이 사물들을 오래 유심히 바라보고 사유하다보니 그것이 바로 철학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버트런드 러셀이 설명하던 철학은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라는 점을 실증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저자는 서른 가지의 사물에 대하여 사유하는 과정에서 주제에 부합하는 철학자 혹은 사상가의 생각을 인용하고 있습니다.(스티브 잡스를 철학자 혹은 사상가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잡스의 인문학적 소양을 충분히 배려한 것이라고 보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신용카드에 대한 사유는 현대 신용사회의 산물이기는 하지만 부채를 늘리는데 크게 일조하고 있음은 신용카드 발급에 제한을 두지 않던 시절 신용불량자를 양산하던 부작용으로 입증되기도 하였는데, 신용카드의 이런 어두운 일면을 이탈리아의 철학자 마우리치오 라자라토의 <부채인간>에 나오는 “돈/부채는 인간 부품에게 신용도, 합의도 요구하지 않는다. 단지 주어진 지시에 따라 정확하게 기능하기만을 명령한다.(16쪽)”라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신용카드는 부채를 만드는 수단이자 삶을 통제하고 통화그물망 안에서 파편화하고 기계적 노예화로 이끄는 방법이다.”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신용카드를 부채를 만드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에서 100퍼센트 동의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즉 신용카드를 내가 지불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사용하는 사람은 저자가 주장하는 부채인간이며 기계적 금융 시스템에 예속된 노예라고 볼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기억과 망각의 관계를 수염을 자르는 면도기에서 발견한 것도 독특하다고 하겠습니다만, 여행가방에서 여행을 읽어낸 것도 대단한 착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연히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을 인용하고 있어 반갑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자는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쉽게 이끌어내는 장소는 찾기 힘들다.’는 보통의 말에서 “새로운 사고는 새로운 장소와 만나는 놀라움에서 튀어나온다. (…) 멕시코에서 맞은 어느 추석날 새벽 한꺼번에 울려퍼지는 성당의 종소리들에서 내가 아는 세계가 결코 세계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암시받았다.(236쪽)”라는 사유를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서른 가지나 되는 사물들로부터 저자가 이끌어내고 있는 다양한 생각은 물론 관련된 철학자 혹은 사상가들의 생각을 덤으로 즐기는 좋은 기회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