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곡 - 천국편 - 단테 알리기에리의 코메디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2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박상진 옮김, 윌리엄 블레이크 그림 / 민음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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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길리우스의 안내로 지옥과 연옥을 돌아보고, 단테의 영원한 연인 베아트리체의 안내를 받아 천국을 돌아보는 단테는 구원을 받아 천국에 살고 있는 영혼들과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본다면 단테가 <신곡-천국편>에서 묘사하고 있는 천국은 그 나름대로의 유토피아이고, 그곳에 들기 위하여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천국은 지구를 떠나 우주에 펼쳐지고 있는데, 천국의 단계는 프톨레마이우스의 우주론을 적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신곡-천국편>에서는 단테의 신학, 철학, 물리학, 천문학, 역사 등의 지식을 동원하여 구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천국편 1곳에서 베아트리체는 천국의 성격을 다음처럼 노래하였습니다. “이곳에서 모든 것들은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하나의 질서를 따르니, 이는 하느님을 닮은 우주의 형상이지요. 거기서 하느님의 숭고한 피조물들은 영원한 힘이신 하느님의 자취를 봅니다. 그것이 바로 우주가 지향하는 목표랍니다.(12~13쪽)” 우주 만물의 질서는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현대물리학에서는 우주가 누구의 의도에 따라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기에 이르고 있습니다만, 당시의 과학수준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설명하기에는 창조론이 적절했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단테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하느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았다고 적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이 계약을 맺었을 때 이 보물과도 같은 자유의지가 봉헌되는데, 그것도 자유의지가 그렇게 의도한 것입니다.(41쪽)” 샘 해리스 박사는 <자유의지는 없다; http://blog.joins.com/yang412/13064786>에서 자유 의지란 ‘앞으로 일어날 일련의 행동을 상상하고, 그 행동들을 선택한 자기 나름의 논리를 심사숙고하며, 이러한 심사숙고에 비추어 자신의 행동을 계획하고, 모순된 욕망들에 직면하여 행동을 통제하는 역량의 집합’이라고 보았는데(53쪽), 지금까지의 신경과학적 연구 성과들을 바탕으로 하여,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는 자유 의지의 허구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신곡>을 옮기신 박상진교수님은 작품해설을 통하여 “천국의 순수한 기쁨을 똑바로 바라보고 이해하기에 너무 부족한 단테는 오직 은총과 의지를 통해 천국의 여러 하늘들을 거쳐 최고의 하늘에 이른다. 천국에서 단테는 신학과 철학의 지식을 동원하여 그 자신과 그 밖에 역사와 세계에 대한 성찰과 반성을 수행한다. 궁극에서 단테는 하느님의 빛으로 해체되는데, 그 자체가 바로 절대적 구원의 경지다.(356쪽)”라고 정리하셨습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면 천국편 17곡에서 “어떤 운명이 내게 다가오는지 알고자 하는 것이 저의 간절한 바람입니다. 운명의 화살은 기대할 때 더 느리게 날아갑니다.(144쪽)”라고 고백하던 단테가 죽은 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을 통하여 구원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점입니다. 이런 것들이 가능한 이유를 “여행이 진행되면서 하느님을 알고 이해하는 순례자의 힘이 자라난다. ‘영원한 빛’은 하느님의 빛으로, 순례자의 영혼에 사랑과 정신적 계목을 북돋우고 있다.(303쪽)”라고 미주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단테가 천국을 시작으로 연옥을 거쳐 천국까지 여행을 하게 된 까닭이 밝혀지는데, “너의 글로 네가 본 모든 것을 드러나게 하고 가려워하는 사람들이 시원하게 긁도록 해 주어라.(150쪽)”, 즉 세상 사람들에게 천국에 이를 수 있는 삶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리라는 사명을 띠고 있음을 명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은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 즉 종교는 믿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기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이것을 저는 믿음의 본질로 생각합니다.(207쪽)” 그런데 지옥에서 천국에 이르기까지 여행을 통하여 보면 죽음 이후의 현세의 삶으로 되돌아오는 경우를 기록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천국에서 영생하는 삶이 기독교의 궁극적 목표가 되고 있다는 점인데, 그렇다면 끊임없이 태어나는 인간들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하는 점과 이들이 죽은 다음에 가는 곳은 무한대로 수용이 가능한 것인가 하는 점인데, 천국은 단테가 찾았을 때만해도 이미 포화상태였다는데, 현세에서 영생할 수 있는 삶을 살은 사람들이나 연옥에서 스스로를 닦아 천국에 오르는 사람들이 갈 자리는 있는 것인지도 궁금합니다. “우리의 도시가 얼마나 드넓은지 보세요. 우리 자리가 이렇게 찼으니, 몇 자리만이 하늘이 아직 원하시는 영혼들에게 남아 있답니다.(266쪽)”

 

기독교 신학이나, 이탈리아 역사에 앎이 부족하여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만, 단테가 <신곡>에 담고 싶었던 의미의 윤곽을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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