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들의 안식처, 에르미타를 찾아서 - 스페인에서 만난 순결한 고독과 위로
지은경 지음, 세바스티안 슈티제 사진 / 예담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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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미타(Ermita)”는 스페인 북부 피레네 산맥 사이에 흩어져 있는 작고 소박한 건축물들을 부르는 이름으로, 이 말에는 ‘은둔지’, ‘사람이 살지 않는 장소’, ‘세상과 뚝 떨어진 집’, ‘사막과 같이 황량함’ 처럼 쓸쓸함과 연관되는 모든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깊은 산속에 세워진 작은 암자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래서 제목에 곁들인 부제 ‘스페인에서 만난 순결한 고독과 위로’는 순례자들의 쉼터에서 그들의 고난의 흔적을 보면서 마음을 정화시키는 여행을 떠올렸습니다. 사진작가와 작가의 환상적인 팀웍이 만들어낼 스토리에 대한 기대도 컸습니다. 어쩌면‘에르미타에 매료되어 7년째 에르미타를 찍어온 벨기에의 사진작가 세바스티안 슈티제(Sebastian Schtyser)와 도시를 떠나본 적 없는 작가 지은경이 에르미타를 찾아 스페인 북부에서 보낸 4개월간의 여정을 담고 있다.’는 설명을 흘려 읽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슈티제가 에르미타를 찾아 사진을 찍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파비올라 여왕 재단의 후원으로 스페인 북부에 흩어져 있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에르미타들을 찍고 있다.(221쪽)”고 하는 것으로 보아 재단에서는 산재해있는 에르미타를 확인하고 사진으로 남기려는 의도에서 후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에르미타라는 독특한 건축물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보존하려고 한다면 사진작가가 아니라 건축을 전공하는 사람들에게 맡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슈티제는 오로지 청명한 계절은 다 제켜두고 겨울철에만 그것도 핀홀 카메라를 가지고 에르미타를 찍어오고 있다고 하는데, 화려하고 발랄한 파란 하늘은 에르미타를 위한 빛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빈자를 위한 교회, 에르미타를 담아내기에는 외롭고 쓸쓸한 작업을 더욱 심화시켜주는 우울한 회색빛이 감도는 겨울날이 제격인데, 이 특별한 빛은 주변을 고요히 잠재우고 구름에 반사된 햇살을 받은 에르미타는 영롱하고 섬세하게 반짝이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22쪽) 게다가 고요한 빛을 부드럽게 묘사하는 핀홀 카메라는 가장 원시적인 사진기로 몽롱한 콘트라스트를 자아내지만 에르미타의 외로움이 가진 모든 디테일을 정성스럽게 세세히 담아내는 재주를 지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핀홀 카메라로 찍은 에르미타는 몽롱하게 보이는 자연의 배경 속에서 조금 더 선명한 모습으로 떠오르는 듯 합니다.

 

이런 분위기는 존 러스킨이 <건축의 일곱 등불; http://blog.joins.com/yang412/13284036>에서 기록한 ‘기억의 등불’의 한 대목을 떠올리게 합니다. “실제로 건물의 가장 위대한 영광은 돌이나 금과 같은 재료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영광은 건물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에 달려 있고 말하고자 하는 바의 울림과 엄밀한 관찰의 깊이에 달려 있으며, 또한 찬성이나 비난이 교차하더라도 인간애의 물결로 오랫동안 씻긴 그 벽을 보며 우리가 느끼는 불가사의한 공감에 달려 있다. (…) 우리가 기대하는 건축의 진정한 빛과 색과 고귀함은 시간이라는 저 황금의 얼룩 안에 있다.(존 러스킨 지음, 건축의 일곱 등불, 240쪽)”

 

이 지역에 산재해있는 에르미타의 건축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하는데, 에르미타는 그 지방의 흙과 돌로 지어져 경관을 해치는 일 없이 매우 자연스럽게 주변의 풍경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이다. 빨간 흙이 많은 산속의 에르미타는 빨간 흙으로, 검은 돌이 많은 산속의 에르미타는 검은 돌로 지어졌다는 것입니다.(86쪽) 기본적인 모습이 비슷한 우리네 암자와는 다른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뾰족한 절벽 위에 홀로 세워져 있는 코르사의 마레 데 데우 데 라 페르투사 에르미타가 절벽의 지형에 의지하여 쌓아올린 것을 보면, 절벽 위의 지형을 살려서 세워졌다는 죽서루가 연상됩니다.(이희봉 지음, 한국 건축의 모든 것 죽서루; http://blog.joins.com/yang412/13210699)

슈티제가 담은 몽환적 분위기의 에르미타들이나, 그곳에 이르는 여정을 담은 사진과 에르미타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의 모습을 담은 수많은 사진들은 그들의 여정에 함께 하는 느낌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은경작가가 정리한 에르미타로 가는 여정, 사진작가의 작업 과정에 대한 기록이나, 오랜 세월 동안 그곳을 지키며 묵묵히 자연 속에 몸을 내맡겨온 에르미타의 모습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미 쇠락해가고 있는 에르미타들에 대한 상세한 자료가 없어서가 아닐까 생각도 해봅니다.

 

여행이 점점 고달파지자 ‘나는 도대체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또 애초에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라는 의문이 들었다는 작가의 고백이 엉뚱하다는 생각과 함께 ‘이 책은 세상으로부터 믿음과 삶에 대해 다른 비전을 가졌던 수도자들과 은둔자들에 관한 이야기(7쪽)’라는 요약에 충실한 내용이었나 곰곰 생각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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