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밀란 쿤데라 전집 14
밀란 쿤데라 지음, 한용택 옮김 / 민음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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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 전작 읽기의 마지막 작품은 에세이집입니다. <만남>을 번역하신 한영택교수님은 “몽테뉴 이래로 에세이라는 장르는 무엇보다도 자유로움과 가소성을 특징으로 한다. 다양한 재료를 버무려 하나의 작품을 빚어내는 에세이에서 영원히 발기 중인 우산과 제복을 만드는 제봉틀이 한 해부대 위에서 조우한다 한들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박성창외, 밀란 쿤데라 읽기, 174쪽)”고 적었습니다. 쿤데라가 “내 성찰가의, 내 추억과의, (실존적이고 미학적인) 내 오랜 주제와의, 내 오랜 사랑(라블레, 야나체크, 펠리니, 말라파르테…)과의 만남…”이라고 헌사에 적었듯이 <만남>은 주로 소설론을 중심으로 한 전작 에세이집 <소설의 기술>, <배신당한 유언들>, <커튼>들과는 달리 음악, 미술, 소설, 시, 영화, 오페라, 역사와 개인, 추방과 망명, 향수, 아이러니, 망각, 공포, 사랑, 키치, 참여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화가의 난폭한 몸짓에서 작가는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과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와의 만남을 다루고 있습니다. “베이컨의 초상화는 ’자아‘의 한계에 대한 질문이다.(19쪽)”라고 정의한 작가는, 베이컨이 “회화에서는 언제나 관습적인 것들을 지나치게 많이 남기고 결코 충분히 제거하지 않지만, 베케트의 작품에서는 너무 많은 것들을 제거하려고 한 나머지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는 인상, 그리고 아무 것도 남지 않음이 공허한 울림을 일으킨다는 인상을 자주 받습니다.(20~21쪽)”라고 분명히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베이컨이 베케트와 가깝다고 본다고 합니다. “예술가가 다른 예술가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언제나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며, 그 점이 예술가의 판단이 흥미로운 이유다.(21쪽)”라는 것입니다.

 

쿤데라는 사람들이 베이컨의 그림에서 ‘공포’라는 단어를 떠올린다고 하지만, 자신은 두렵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베이컨의 어떤 그림에서도 아름다움이 결핍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들뢰즈 역시 “외양은 구상에만 해당될 따름이다. 벌써 형상은 죽지 않고 아직 살아남아 있는 구상의 관점에서만 괴물처럼 보인다. 우리가 이것을 ‘형상적으로’ 보자마자 괴물적이 되기를 멈춘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형상들은 그들이 채우고 있는 일상적인 업무에 따라, 그리고 그들이 직면한 순간적인 힘의 기능에 따라 가장 자연스러운 포즈를 취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질 들뢰즈 지음, 감각의 논리, 173쪽; http://blog.joins.com/yang412/13157096)”라고 베이컨의 그림을 이해하고 있어 쿤데라와 그 맥을 같이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독자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만남을 시작하지만, 이어서 도스토엡스키의 <백치>, 루이페르디낭 셀린의 <성(城)에서 성(城)으로>, 필립 로스의 <욕망의 교수>, 구드베르구르 베르스송의 <백조의 날개>, 마레크 비엔치크의 <트보르키>, 후안 고이티솔로의 <그리고 막이 내릴 때>, 그리고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 등에서 뽑아낸 나름대로의 독특한 주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백치>에서는 ‘희극성의 희극적 부재’가 꼬투리가 되는 웃음인데, 이 유머없는 웃음의 세계는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살아야만 하는 세계라는 것입니다. <트보르키>에서는 한쪽에서 일상성에서 재발견되고 가치가 회복되고 노래로 변한 순정적인 사랑을 발견하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는 목을 맨 아가씨가 있는 이중성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만남>의 표지 그림에 관한 생각입니다. 민음사판 밀란 쿤데라 전집은 르네 마르리트의 작품을 표지그림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만남>의 표지는「아르곤의 전투」(The Battle of Argonne)를 쓰고 있습니다. 다섯 번째 에세이 ‘복합적인 만남처럼 아름다운’에서는 마침 달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브를뢰르의 모든 그림에서 달은 초승달이고, 수평으로 놓였으며, 뾰족한 두 끝은 위를 향한다. 마치 밤의 물결 위에 떠 있는 곤돌라 같다. 화가의 상상력이 아니라, 마르티니크의 달이 실제 그렇다. 유럽에서는 초승달이 서 있다. 호전적이며 웅크리고 앉아 튀어 오를 준비가 된 사나운 작은 동물 같거나 아니면 완벽하게 날이 선 낫 같다고도 할 수 있다. 유럽의 달, 그것은 전쟁의 달이다. 마르티니크에서는 달이 평화적이다.(149쪽)” 그런데 마그리트의 「아르곤의 전투」에 그려진 달은 그믐달입니다.

 

쿤데라가 에세이에서 다룬 작품들 대부분이 아직 읽지 못한 것들이라서 이해가 충분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들 작품을 읽은 다음에 다시 읽어보면 느낌이 다를 것으로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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