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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4세와 베르사유 궁정
생시몽 지음, 이영림 편역 / 나남출판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마르셀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다양한 문학작품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생시몽의 <회고록>의 경우는 콩브레의 이웃 스완이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중략) 오늘 아침 저는 생시몽의 글에서 어르신께서 재미있게 생각하실 구절을 읽었습니다. 생시몽이 스페인 대사로 재직했을 때의 일들을 기록한 것인데, 그가 쓴 것 중에 가장 훌륭하진 않지만, 그것도 일기에 불과합니다만, 그래도 아주 경탄할 만큼 잘 쓴 일기입니다. 그 점이 우리가 아침저녁으로 읽어야만 하는 저 지루한 일기들인 신문들과는 첫 번째로 다른 점일 겁니다.(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스완네 집 쪽으로(1), 54쪽, 민음사)”라고 평하면서, 그 가운데 ‘나는 그것이 무지(無知)인지 또는 덫인지 모르겠지만, 그가 우리 아이들에게 손을 내밀려고 했을 때 재빨리 눈치를 채고는 막았다.’라는 구절을 인용하고 할아버지는 ‘무지(無知)인지 또는 덫인지’라는 표현에 감탄하셨다고 적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모할머니 옥타브 부인과 하녀 프랑수와즈의 관계를 묘사하면서도 생시몽이 <회고록>에서 적고 있는 루이14세와 그의 신하들 사이의 묘한 관계를 이끌어오기도 합니다.
생시몽(1675~1755)은 루이 14세의 치하에 생존했던 인물로 당시 프랑스 궁정에서 겪은 일들을 <회고록>이란 이름으로 정리하였는데, 그 분량은 56줄짜리 2절판 공책 총 173권 분량의 방대한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다양한 발췌본과 선집이 출판되었다고 하는데, 국내에는 다니엘 데세르가 1994년에 쓴 <루이와 그 궁정>을 우리말로 옮긴 <루이 14세와 베르사유 궁정>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옮긴이가 데세르의 책을 옮기게 된 것은 원문을 요약하거나 수정을 가한 다른 축약본과는 달리 원문을 전혀 손상시키지 않았고, 루이 14세의 성격과 그의 궁정운영방식을 드러내는 부분이 중점적으로 발췌되었다는 점을 고려하였다고 합니다. 생시몽의 <회고록>의 일부를 발췌하였음에도 <루이 14세와 베르사유 궁정> 역시 752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입니다. 옮긴이는 서문에서 “생시몽의 문체는 아카데미의 통제를 받는 당시 문인들의 것과는 사뭇 다르다. 문인들이 엄격한 형식에 묶인 반면 생시몽의 글은 세련되거나 규격적이지 않다. 대신 끝없는 수사로 이어지는가 하면 짧고 명쾌한 격언구와 대화투의 문장이 자유롭게 등장하는 생시몽의 <회고록>은 생생하며 신랄하다.(7쪽)”라고 적고 있습니다.
편저자인 데세르는 소위 회고록이라고 하는 저작물들이 기술하고 있는 연대기의 신빙성이 의심받고 스스로의 멋진 역할을 부각시키고, 자신의 말이 진실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자기변명으로 일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많은 학자들이 생시몽의 <회고록>의 편파성과 오류, 누락을 지적하면서 증거물로서의 가치를 문제 삼고 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하지만 생시몽 자신은 위대한 왕의 궁정에서 보고들은 것을 가장 ‘실증주의적’ 방식으로 기술했다고 믿었고 스스로를 공정한 관찰자로 규정하였었다고 적기도 했습니다. 즉, 선입관, 과장, 날조된 인과관계에도 불구하고 생시몽은 믿을 만한 증인임이 확실하다고 하였는데, 생시몽이 호사스럽고 전지전능하며 화려한 연극무대 같은 베르사유에서 고립상태에 빠져 있던 왕의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왕에 대하여 분명했던 통찰력을 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베르사유궁전을 짓고 태양과 같은 절대권력을 휘둘러 후대에 태양왕이라 불린 루이14세가 사실은 군사와 행정 주도력의 결함뿐 아니라 전통적이고 경박한 신앙심으로, 제한된 능력의 소유자였던 루이14세는 결코 진정한 의미의 절대군주가 될 수 없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실제로 <루이 14세와 베르사유 궁정>을 읽다보면 이래 가지고 패권을 두고 수시로 갈등을 붙던 유럽대륙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인 것 같습니다.
왕과 왕족을 둘러싼 귀족들과 대신들의 암투 그리고 사랑노름들이 1부와 2부로 나뉘어 서술되고 있는 가운데,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할머니의 우상인 세비녜부인(1626~1696)이나, 역시 마르셀이 관심을 쏟던 연극과 관련하여 인용하곤 하는 희곡작가 라신(1639~1699)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어 눈길을 끌었습니다. 생시몽은 세비녜부인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편안하고 선천적으로 우아하며 재치를 겸비한 그 여인은 대화를 통해 재치를 지니지 못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재치를 나누어주었다. 게다가 그녀는 매우 친절할 뿐 아니라 모든 것을 꿰뚫고 있으면서도 결코 아는 척하는 법이 없었다.(86ㄸ쪽)” 한편 라신에 대하여는 “그보다 더 심오한 정신세계를 지난 사람도 더 정교하게 다듬어진 글을 쓰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대인관계에서 그는 전혀 시인답지 않았으며 예의바르고 겸손했다.(116쪽)”라고 적었습니다.
방대한 분량인데다가 루이14세를 둘러싸고 있는 인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어 다소 지루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만, 적어도 17세기 프랑스 궁정의 모습을 가늠해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