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리라이팅 클래식 15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고전평론가 고미숙박사님의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를 책꽂이에 넣고서 참 오랫동안 묵혀두었습니다. 한의학의 본산이라 할 동의보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을 해볼 요량이었는데, 의학과는 기본틀이 다른 한의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에 자칫 길을 잘 못 들어서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한때 한의학과 관련된 책들을 읽고 부정적으로 이해한 적도 있습니다만, 앎이 늘어가면서 점점 중도적 위치로 선회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일단 책을 읽은 소감을 한 줄로 정리하면 종합의학서라고 할 <동의보감>을 인문학적 시각으로 해석한데 그치고 말았구나 싶습니다. 인트로(책을 읽으면서 처음 만나는 단어입니다. 재즈나 댄스음악의 도입부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우리말로는 서주(序奏)라고 번역되는 단어를 동의보감이라는 고전을 해석하는 책에서 굳이 영어로 적은 것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의 모두에서 인용하고 있는 ‘신형장부도’를 프랑스 철학자 미셀 푸코가 쓴 <말과 사물>의 모두에서 인용하고 있는 벨라스케스의 그림 <시녀들>과 연결하는 것도 의서인 <동의보감>을 인문학적으로 접근하려는 저자의 의도가 읽히는 듯 합니다. 새로운 접근방식이라는 생각이 드는 한편 아무래도 한의학에 대한 기본적 학습이 충분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저자가 전통의학이나 현대의학에 관한 글에서 읽은 지식들을 바탕으로 동의보감을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직접 환자진료를 담당하는 요즘으로 치면 임상의가 있었는가 하면, 유의(儒醫) 즉 학문적 관심으로 의학을 공부한 유학자로서 요즘으로 치면 의학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의서를 탐구하여 스스로 이치를 깨달아 의학적 조언을 해줄 수 있는 경지에 이른 유의는 돈을 받고 진료행위를 하지는 않았지만, 내의원에서 중요한 의학적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 개입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 이유로 동의보감에 담긴 내용을 살펴 이해하기에 이르렀다면 그 내용을 두고 충분히 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듯합니다. 게다가 저자는 한의과대학생의 도움으로 동의보감을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고백하셨는데, 허준이 동의보감에 담은 한의학적 사상을 어디까지 이해하실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이 시대의 의학이 국가가 공인하는 전문가의 몫으로 폐쇄적이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환자들은 자기가 왜, 어떻게 아픈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즈음처럼 질병에 관한 정보가 책이나 미디어, 심지어는 인터넷 공간을 통해서 넘쳐난 적은 없었습니다. 특히 비전문가들이 의학분야의 책을 읽고 피상적으로 파악한 내용을 정통한 정보인양 확산시키고 있는 것이 일반인의 건강을 위협할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생명을 다루는 의학분야에 대하여 국가가 면허제도를 통해서 관리하고 있는 이유를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전문가의 영역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다만 자신과 관련되었을 때, 충분하게 설명을 들을 수 있으면 될 것입니다.

 

현대의학이 폐쇄적이고 기술적인 반면 한의학을 포함한 동양의학은 기술이나 제도에 의존하지 않고도 터득할 수 있어 보편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동의보감>이 술술 읽혀 별 거리낌없이 독파할 수 있었다는 점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선조께서 허준에게 명하신 의서편찬의 방향 가운데 세 번째, “궁벽한 고을에 치료할 의사와 약이 없어 요절하는 자가 많은데, 우리나라에서는 약재가 많이 산출되지만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니 종류별로 나누고 우리나라에서 부르는 명칭을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하라.(39쪽)”는 말씀을 새겨보면 <동의보감>이 대중을 위한 의학백과사전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전문가를 위한 깊이 있는 의학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학문은 시대에 따라서 발전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의보감>은 편찬 이래 중수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것 같지 않습니다. 즉 죽은 의학서라는 것이지요. 박물관에 가야 할 옛날 의서에 목을 메고 있는 한의학계가 안타까울 뿐입니다.

 

단편적인 앎은 생각을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어가기 마련입니다. 한 가지만 예로 들면, “시체를 해부해서는 아무 것도 배울게 없다. 해부학은 진정한 자연과 자연의 본질, 특징, 존재, 힘을 보여주지 못한다. … 참된 해부학은 … 살아 있는 인체이다.(28쪽)”라는 16세기 의학자 파라셀수스의 주장을 인용하고 있는데, 16세기 서양의학의 해부학적 기술은 아주 저급한 수준에 머물고 있었고, 게다가 파라셀수스는 “모든 독은 약이다, 다만 용량의 문제일 뿐이다.”라는 말로 유명한 약리학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분입니다. 해부학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지 의문이라는 말씀입니다. <동의보감>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는 저의 기대가 지나쳤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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