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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5년 5월
평점 :
오르한 파묵 전작 읽기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파묵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다양한 주제를 담아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은 파묵의 오랜 화두인 동서양 문명의 충돌이 이번 작품에서는 동서양의 종교원리의 충돌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서구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이슬람 근본주의자와 세속주의자의 갈등, 쿠르드족을 비롯한 다양한 인종들 사이의 갈등, 민간이 군부와 결탁하여 국지적 구데타를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불안한 사회적 구조 등을 그리려다 보니, 이스탄불을 벗어나 아르메니아 국경 근처에 있는 작은 도시 카르스를 무대로 삼은 것 같습니다.
주인공 카(Ka)는 시인으로 과거 반정부운동에 연관되어 독일로 망명하고 있었는데, 어머니의 부음을 받고 12년 만에 이스탄불로 돌아오는데, 여성들의 연쇄 자살 사건과 진행 중인 시장 선거를 취재하라는 임무를 받고 폭설(Kar)을 헤치며 카르스(Kars)에 도착합니다. 카가 이곳으로 향한 가장 큰 이유는 이루지 못했던 옛사랑 이펙과의 인연을 다시 이어보기 위해서입니다. 카르시에서 마치 전염병처럼 일어나고 있는 여성들의 자살사건들은 최근에 읽은 최수철교수님의 소설 <페스트; http://blog.joins.com/yang412/13220780>를 연상하게 합니다. 이슬람 원리주의세력과 개혁세력 모두 카르스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살에 대한 사회의 관심을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습니다. 원리주의자인 라지베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자살은 커다란 죄악입니다! 관심을 가질수록 이 병은 확산되지요!(115쪽)” 자살한 여성들의 뒤를 쫓는 한편 이펙을 만나는 과정에서 교내 ‘히잡’ 착용을 금해 한 여학생을 자살로 몰아넣은 교육원장이 살해되고, 이어서 무대예술가 수나이가 군부-경찰을 주도하여 일으킨 쿠데타에 휩쓸리게 됩니다. 쿠데타 세력들은 이슬람 원리주의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목적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며 카는 두 개의 세력 사이에 끼어든 셈이 됩니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 우선 카에서 작가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1권이 끝나면서 정작 작가가 카의 친구로 등장하면서 잠시 혼동에 빠지게 됩니다. 오랫동안 시작활동을 접고 있던 주인공은 카르스에서 급변하는 상황을 맞으면서 시적영감이 봇물 터지듯 일면서 시를 이어서 쓰게 되는데, 정작 그 시들을 적은 시작(詩作)노트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맙니다. 또한 등장인물 들 사이의 관계 역시 복잡하게 얽히고 설키면서 이펙과의 사랑을 완성해서 독일로 돌아가려는 카의 생각은 꼬이고 마는데... 이런 전개를 따라가다 보면 최근에 읽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 http://blog.joins.com/yang412/13243912>에서 설명하고 있는 비극의 이론을 제대로 따라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활인으로서 느끼는 눈에 대한 복잡한 감정은 파묵 역시 같은 모양입니다. “눈은 항상 도시의 더러움, 진흙, 어둠을 덮어 잊혀진 순수한 감정을 그에게 일깨워줬었다. 하지만 카르스에서 보낸 첫날, 카는 눈과 관련된 이 순수한 감정을 잃어버렸다. 이곳에서의 눈은 그를 지치게 하고, 지겹게 하고, 위축시키는 종류의 것이었다.(1권 22쪽)” 그러면서도 무신론자인 카로 하여금 “눈의 고요함은 나를 신에게 가까이 가게 만드는 것 같아.(93쪽)”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도 파묵의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몇 가지 특징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앞서 말씀드린 교육원장의 죽음처럼 공공의 장소에서 일어난 총격사건이라든가, 2권에 등장하는 작가가 카의 유품을 챙기는 과정에서 <순수박물관>에 대하여 언급한다거나하는 등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등장인물들 사이에 복잡하게 얽혀있는 관계는 여러 차례의 반전을 보이면서 비극적 결말로 치닫고 있어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파묵의 전작 읽기의 대미를 장식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고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