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가 달린다
마크 롤랜즈 지음, 강수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주말에 양재천 산책길에 나가면 땀을 뒤집어 쓴 채로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달리는 분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보니 마지막으로 달려본 것이 언제였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달리는 재주가 없어 단거리는 반에서 꼴찌를 면한 적이 없고, 장거리 달리기 역시 달리기 시작하면 이내 숨이 턱에 차서 주저앉는 편이 수월해서인지 걷기는 할지언정 달리기는 기피대상이 되고 말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달리기 열풍으로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달리기를 시작했다는데도 선뜻 나서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달리는 분들도 이유가 참 다양할 것 같습니다. 건강을 위하여, 혹은 기록에 도전하기 위하여 등등... 그런데 철학자는 왜 달리기를 할까요? <철학자가 달린다>는 제목의 책을 보고 첫 번째 든 궁금증입니다. 영국 웨일스 뉴포트 출신으로 현재 미국 마이애미 대학교 철학과 교수인 마크 롤랜즈교수는 <철학자와 늑대>에서 야성이 남은 늑대와 11년을 같이 지내면서 돌아보게 된 인간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유머와 감동으로 풀어내 인기몰이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늑대가 롤랜즈교수의 집에 처음 들어왔을 때 집안의 물건들을 물어뜯어 자칫 집안이 초토화될 위기를 맞으면서 개를 지치게 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본격적으로 달리기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모두 여덟 개로 나눈 글은 저자의 달리기에 관한 시대적 배경을 다루고 있습니다.

 

2011년 ING 마이애미 마라톤 대회에 처녀 출전하는 과정으로 시작하여, 세월을 거슬러 소년시절을 보냈던 영국의 미니드 마엔에서 개 부츠와 달리기를 하던 1976년의 기억, 앞서 말씀드린 늑대 브레닌과 달리기를 하던 아일랜드의 레스모어반도에서의 1999년의 추억, 이어서 마이애미로 이주한 2007년 새로 만난 개 휴고와 마이애미의 위험한 소택지를 달리던 추억, 그리고 늑대 브레닌과 프랑스 오브강둑에서 늑대 브레닌과 마지막으로 달리던 추억을 거쳐서 2011년 ING 마이애미 마라톤 대회를 마무리하기까지의 이야기입니다.

 

어렸을 적부터 집에서 기르던 개 부츠와 동네 야산을 뛰어오르던 롤랜즈교수가 늑대 브레닌 때문에 다시 뛰게 되었다고 이야기를 하고는 있습니다만, 사실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말벗도 하고 격려도 주고받거나, 바람도 함께 느끼면서 같이 있으려고 함께 달리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롤랜즈교수는 개 혹은 늑대와 함께 달리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장거리 달리기가 궤도에 오를 때마다 생각이 멈추고 사유가 시작되는 시점이 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달리기는 사유가 들어오는 열린 공간으로, 저자는 자신의 육체가 달릴 때, 그의 사유도 장비나 선택과는 거의 무관한 방식으로 함께 달린다(80쪽)고 합니다. 저자는 이런 현상이 자신만의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달리기! 이보다 더 행복하고 짜릿하며 상상력을 자극하는 활동이 도대체 있을까? 달리는 동안 정신은 육체와 함께 달아나고, 뇌 속과 다리의 리듬과 팔의 흔들림 속에서 신비로운 언어의 꽃이 만개해 고동치는 것 같다.(81쪽)’라고 한 미국 작가 조이스 캐럴 오츠나 ‘내가 달릴 때, 나의 정신은 텅 빈다. 달리는 동안 드는 모든 생각은 그 과정에 종속되어 있다. 달리는 동안 나를 덮치는 사유는 갑자기 나타났다가 아무 것도 바꾸지 않은 채 홀연히 사라지고 마는 가벼운 돌풍과 같다.(82쪽)’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인용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즉흥적으로 결정한 마라톤대회 참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종아리근육이 파열하는 위기도 맞게 되지만 출전을 강행하게 된 것은 쇠락하는 육체와 정신의 한판 승부를 붙여보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장거리 달리기의 자유를 스피노자보다는 데카르트의 자유라고 비유하고 있는 저자는 마이애미 마라톤대회에서 하프코스에서 풀코스를 뛰기로 마음을 바꾸는 과정에서 앞서 말씀드렸던 달리기와 사유와의 관계를 철학적으로 재미있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제 나는 장거리 달리기에서 자아가 독립된 부분이나 단면들이 아니라 스피노자의 체화된 형태에서 데카르트의 탈육체화를 거쳐 흄의 춤추는 사유로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으로 나타나는 것을 본다.(221쪽)” 이런 단계를 자아의 해체과정이라고 본 저자는 하프코스를 넘어가면서 느낀 사르트르기라고 명명하는 새로운 경험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스피노자기에서 데카르트기를 거쳐 흄기까지 오는 동안 자아는 육체와 정신의 연장선에서 정신으로 그 다음은 다시 사유로 축소된다. 사르트르기에는 정신이 사유에서 무(無)로 더욱 축소된다.(223쪽)”

 

이처럼 저자는 달리기를 하면서 느끼는 다양한 누낌을 철학적, 의학적 관점에서 사유한 결과를 쉽게 설명하고 있어 색다른 책읽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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