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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오 영감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박영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평점 :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 역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제대로 다시 읽기 위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발자크 작품은 학생 때 <골짜기의 백합>을 읽었던 기억이 전부입니다. 1827년 ‘올빼미당’으로 데뷔한 발자크는 1933년 무렵 자신이 직접 보고 경험한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모든 것을 소설을 담아내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인간희극>이라는 큰 제목의 이 구상은 「풍속연구」, 「철학적 연구」, 「분석적 연구」라는 세 계열로 구분하여 137편의 소설을 계획하였고, 91편을 완성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발작크의 작품세계는 프루스트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발자크의 <인간희극>에는 <고리오 영감>에서 처음 시도된 인물 재등장 기법이라는 독특한 소설기법을 사용하고 있다고 하는데, 최근 읽은 이응준의 연작소설 <밤의 첼로; http://blog.joins.com/yang412/13184062>에서 읽으면서 재미있다고 생각했던 점입니다. 유예진교수님은 발자크가 구사한 재등장 기법을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독자는 한 편의 소설을 통해 익숙해진 인물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다름 편 소설에서는 육체적, 사회적, 심리적으로 변화된 모습을 접하며 더욱 안타까운 심정이 되고, 발자크의 소설들은 한결 빠르고 적접적으로 독자들에게 다가살 수 있는 장점을 갖게 되는 것이다.”(프루스트가 사랑한 작가들, 77쪽; http://blog.joins.com/yang412/13111784)
<고리오영감>은 파리 뇌브 생트 주느비에브 거리에 있는 <보케르 집>이라고 하는 다락방이 딸린 4층 건물의 고급 하숙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엮어 내는 이야기입니다. 쉰쯤 되는 과부 보케르부인이 주인이고, 공화국 육군 출납 지불관의 미망인 쿠튀르 부인과 빅토린 타유페르양, 푸아레노인과 전직 도매상인 보트랭씨, 늙은 처녀 미쇼노양과 전직 제면업자 고리오영감, 그리고 앙굴렘에서 파리로 법학을 공부하러 올라온 청년 으젠 드 라스티냐크 등입니다. 제목은 <고리오 영감>입니다만, 이야기는 라스티냐크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이야기는 프랑스 사교계를 통해서 단숨에 신분상승을 꾀하는 군상들의 위선과 속임수, 그리고 딸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헌신을 헌신짝처럼 저버리는 딸과 사위들의 배신, 그런 사람들에게서 좌절하는 젊은이의 순수함 등을 읽을 수 있습니다. 라스티냐크는 시골에 있는 부모와 두 누이동생의 기대를 한 몸에 담고 파리로 올라오지만 하라는 법학공부에는 관심이 없고 사촌누이 보세앙 자작부인의 후원을 받아 사교계에서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줄 여성을 붙잡겠다는 꿈을 세우게 됩니다. 시골의 어머니와 누이들에게 자금을 마련해달라는 편지를 내어 종자돈을 확보한 그의 눈에 띈 여성이 바로 고리오 영감의 작은 딸 델핀입니다. 젊어서 제분업으로 큰 돈을 번 고리오영감은 큰 딸 아나스타지와 작은 딸 델핀을 좋은 상대와 맺어주려 하지만 큰 딸은 레스토 백작과 작은 딸은 알자스 출신 은행가 뉘싱겐 자작과 결혼을 하게 되는데, 두 딸을 자신의 목숨보다 사랑하는 고리오영감은 모든 재산을 정리하여 두 딸에게 오륙십만 프랑씩 나누어 주고 자신은 지내기에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연금만을 남겨 하숙집으로 거처를 옮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딸은 각각 남편에 속아 재산을 빼앗길 위기를 맞게 되고 아버지에게 손을 벌리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돈이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화수분 같은 존재에 불과한 것이고, 결국 두 딸이 위기에 몰리는 상황에 충격을 받아 숨을 거두게 되지만 두 딸과 사위는 임종은커녕 장례식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 옛말에도 딸은 도둑이라고 합니다만, 프랑스도 비슷한 모양입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딸은 우리 것이었고, 우리는 딸에게 전부였지요. 하지만 다음날에는 딸은 우리의 적이 되어버려요.(105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리오 영감의 딸에 대한 사랑은 요즘말로 딸바보라고 할 정도로 맹목적인 것 같습니다. “이 내가 두 딸이 눈물을 한 방울이라도 흘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면 성부와 성자와 성신까지도 팔아도 좋다고 생각했는데!(207쪽)”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미스터리한 인물 보트랭이 암수를 써서 오빠를 제거하여 유산을 상속받게 되는 빅토린과 결혼하고 유산을 나누자는 제안을 거부하는 것을 보면, <고리오영감>에 등장하는 라스티냐크는 야망은 있으나 아직 순수하다고 하겠습니다. 사교계에서 오가는 비밀스러운 남녀관계에 관한 발자크의 이야기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중심이 되는 사교계에서 화제거리로 삼기에 적절하였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