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60> 어느 예술가의 마지막 일주일 - 굶어죽기도 어려운데...
 

흔히 감상하기 어려운 이국적 분위기가 물씬 나는 영화입니다. 프랑스영화지만 무대는 이란의 수도 테헤란입니다. 아마도 뱅상 파로노와 같이 메가폰을 잡은 마르잔 사트라피가 고국 이란에 헌정하려는 뜻이 담긴 것 아닐까 싶습니다.

 

영화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나세르 알리 칸(마티유 아말릭 扮)이 바이올린을 구입하는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악기상에서 연주해볼 때는 느끼지 못했지만 집에 와서 다시 연주해보니 음색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듯 악기상에 돌아가 화를 내면서 반품을 하고 맙니다. 평소 아끼던 바이올린이 망가져 새로운 바이올린을 구입하는 일에 몰두하는 남편 나세르를 아내 파린기세(마리아 드 메데이로스 扮)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돈을 버는 일은 물론 집안일에는 관심이 없는 남편을 몰아세우기 일쑤입니다. 음악하는 사람은 자신 뿐 아니라 음악을 이해하는 배우자를 만나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마음에 드는 바이올린을 구하지 못해서 낙심해 있는 형 나세르에게 동생은 다른 도시에 있는 악기상에 스트라디바리우스가 있다는 소문을 전해주고, 나세르는 맡길 데가 없는 작은 아들을 이끌고 바이올린을 사러 갑니다. 하지만 이 바이올린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아 낙망한 끝에 나세르는 더 이상 바이올린을 구하려 들지 않고 죽음을 기다리기로 합니다.

 

이제 나세르는 먹는 것마저도 거부하고 침대에 누워 죽음이 찾아오는 날을 기다립니다. 영화를 보면서 스콧 니어링이 떠올랐습니다. 대공항으로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던 1930년대 아내와 함께 뉴욕을 떠나 버몬트에 자리를 잡은 스콧 니어링은 조화로운 삶을 화두로 삼고 살았는데 먹고 사는데 필요한 것들은 최대한 자급자족하고, 이웃과 협동해서 일은 하지만 이윤을 추구하는 경제활동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며 살다가 100세가 되던 해에 스스로 살만큼 살았다면서 음식섭취를 줄여가다 죽음을 맞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주인공 나세르는 어느 날 갑자기 음식을 끊고 죽기로 결정을 했다는 것입니다. 인터넷에서 찾아낸 것이라서 정확한 정보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독일이 유태인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얻은 결과라고 합니다. 대체로 물만 먹고 사는 경우에 남자는 2주 정도 여자는 1~2달 정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물조차 먹지 않는다면 남자는 4~7일, 여자는 2주까지도 버틸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면 영화에서 말하는 죽음에 이르는 일주일이라는 설정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단식을 하게 되면 우선은 혈중에 있는 혈당을 사용하고 간에 저장되어 있는 글리코겐을 끌어내게 됩니다. 글리코겐이 소모되면 지방과 단백질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오랫동안 단식을 해본 사람들은 메스꺼움과 피로,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기력이 떨어지면서 화청과 환시가 나타날 수도 있는데, 영화에서 단식 엿새째인가 죽음의 사자가 등장하는 것도 주인공이 환청과 환시로 만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죽기로 결심한 주인공이 단식을 선택했을까 궁금해집니다. 흔히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은 실행을 주저하는 단계를 건너게 되면 스스로의 선택을 포기할 것을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주인공은 ‘기찻길에 누워서?, 아니면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까? 독약을 먹거나 총으로 머리를 쏘면?’하고 다양한 방법을 머릿속에서 그려봅니다만, 결론은 너무 아플 것 같다는 생각에 포기하게 됩니다. 그런 것을 보면 충동적인 성격은 아닌 것 같고 무언가를 결정하기 위하여 오랫동안 심사숙고하는 타입인 것 같습니다. 결국은 식음을 전폐하기로 한 것인데 덕분에 감독은 우리의 주인공이 죽으려는 결심에 이르게 된 과정을 조금씩 보여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찍 바이올린에 재능을 보인 주인공은 좋은 선생님을 사사하게 되지만 스승은 나세르의 연주는 기술적으로는 완벽할지 모르나 연주에 혼이 들어있지 않은 것이 결정적인 흠이라는 지적을 받습니다. 하지만 우연히 시계점에서 만난 이란(골쉬프테 파라하니 扮)에 빠져들고 그녀 역시 나세르에게서 사랑을 느끼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앞날이 불투명한 예술가에게 딸을 줄 수 없다는 이유로 완강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실연의 아픔을 겪게 되고, 그 아픔이 승화되어 그의 바이올린연주는 완성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세르의 연주가 완성되어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며 하산하라고 이른 스승께서는 역시 자신의 스승으로부터 받은 바이올린을 나세르에게 건네주고, 그 바이올린은 나세르의 연주에 날개를 달아주는 역할을 한 셈입니다. 그런 바이올린이 부서졌으니 아무리 훌륭한 스트라디바리우스라고 하더라도 나세르의 마음에 드는 음색이 나올 수 없었던 것이겠지요.

 

일찍 바이올린에 재능을 보인 주인공은 좋은 선생님을 사사하게 되지만 스승은 나세르의 연주는 기술적으로는 완벽할지 모르나 연주에 혼이 들어있지 않은 것이 결정적인 흠이라는 지적을 받습니다. 하지만 우연히 시계점에서 만난 이란(골쉬프테 파라하니 扮)에 빠져들고 그녀 역시 나세르에게서 사랑을 느끼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앞날이 불투명한 예술가에게 딸을 줄 수 없다는 이유로 완강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실연의 아픔을 겪게 되고, 그 아픔이 승화되어 그의 바이올린연주는 완성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세르의 연주가 완성되어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며 하산하라고 이른 스승께서는 역시 자신의 스승으로부터 받은 바이올린을 나세르에게 건네주고, 그 바이올린은 나세르의 연주에 날개를 달아주는 역할을 한 셈입니다. 그런 바이올린이 부서졌으니 아무리 훌륭한 스트라디바리우스라고 하더라도 나세르의 마음에 드는 음색이 나올 수 없었던 것이겠지요.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나세르도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던지 오로지 그만을 바라보고 기다리던 파린기세의 은근한 사랑을 받아들여 결혼하고 두 아이를 얻게 되는데 아마도 파린기세도 남편이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투정을 부리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투정이란 것도 상황을 보아가면서 적당한 선을 지켜야 하는 것인데, 한 순간 울컥하는 감정을 이기지 못했던 것이 결국은 가냘프게 이어주던 인연의 실마저도 단호하게 끊어버리는 결심으로 치닫고 말았으니 결국 욕심이 과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교훈을 깨닫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반대가 심한 것도 아픔이었을 나세르로서는 아버지의 반대를 받아들여 떠나버린 이란에게서 배신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배신한 여인에 대한 첫사랑도 유효한가요? 첫사랑이 그토록 절절했다면 파린기세의 사랑을 단호하게 거절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현실의 삶을 어쩔 수 없다하여 파린기세의 사랑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한다면 나세르는 지독하게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인 것 같습니다.

 

누군가 간절하게 기도하는 경우에 죽음을 늦출 수 있다는 생각은 아마도 이란사람들 사이에서 내려오는 것 같습니다. 산만해서 정신없어 보이는 작은 아들이 아빠를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모습에서 말썽꾸러기 아이가 오히려 부모에 대한 간절함이 더 하다는 생각은 우리사회만이 아니라 이란에서도 공통적인 특징이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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