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기술 -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카트린 파시히.알렉스 숄츠 지음, 이미선 옮김 / 김영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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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입니다.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만난 친구가 사는 정읍으로 놀러갔습니다. 이튿날 아침 세 사람이서 내장사에 올라갔는데, 내장사 못미처에 있는 폭포를 구경하다가 백양사를 먼저 보기로 한 것입니다. 당연히 백양사로 넘어가는 길을 찾아갔어야 하는데, 폭포 옆 절벽을 따라 올라 산등성이를 타고 가기로 한 것입니다. 요즘처럼 내비게이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도가 있는 것도 아니며, 정읍친구도 그길로 백양사에 가본 적도 없었던 것입니다.

 

절벽 위로 올라서 내장사로 가는 계곡을 굽어보면서 산등성이를 타고 걷기 시작했지만, 이내 길을 잃고 산속을 헤매기 시작한 것입니다. 태양을 방향삼아 산꾼이 다닌듯한 오솔길을 따라 남쪽으로 향해 걷다가 냇물을 발견하고서는 냇물을 따라 걸어 내려갔습니다. 하루 온종일을 걸어 내려간 끝에 인가를 만나고 결국은 백양사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한참을 기운 다음이었습니다. 장성까지 버스를 타고 내려갔다가 기차로 정읍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캄캄한 저녁이 되었습니다.

 

아마 제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저지른 황당사건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저질러봐야 생각지 못한 구경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는 책을 만났습니다. 카트린 파시히와 알렉스 숄츠가 같이 쓴 <여행의 기술>입니다. 저자들은 ‘들어가는 말’에 책을 쓴 의도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길을 잃는 것에 대하여 두려워하는 것은 길을 잃은 상황을 스스로 적절하게 통제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한 다는 것입니다. 실수로 길을 잃어버릴 일이 없어지면 의도적으로 길을 잃는 것이 흥미로워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솔직히 길을 잃는 것이 시간을 절약해준다거나, 훨씬 경제적이라거나, 휴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거나와 같은 저자들의 주장은 별로 공감이 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길을 잃어야 새로운 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는 주장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의도적으로 길을 잃어봐야 한다고 전제를 하고는 있지만, 사실 이 책의 내용을 길을 잃었을 때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는가 하는 방법을 안내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읽어가다 보면 저자들의 의도가 읽히는 부분을 만나게 됩니다. “이 책을 여행기로 채우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초보자가 길을 잃었을 때 어떤 정신 상태를 갖고자 노력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서술하는 것이 중요하다.(195쪽)”고 적은 부분입니다. 그런 방법들 가운데 반드시 기억해야 할 구절은 “자연과 합일이 되고 패닉에 빠지지 않는 한, 자연은 너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128쪽)”라고 생각합니다. 길을 잃었을 때에는 보수적으로 행동하기, 걱정하기, 일찍 되돌아가기와 같은 것들이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변을 면밀하게 관찰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풍경은 절대로 우연히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괴테가 1829년에 쓴 <이탈리아 여행>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는 작은 시냇물에서 시작해서 이것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어떤 강의 지류에 속하는지를 생각하면서 이 지역을 파악했다. 그리고 자연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면, 산과 계곡은 그냥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132쪽)” 앞서 내장산에서 길을 찾아 헤매던 저의 경험과도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하나 더 제가 콜로라도 국립공원을 따라 운전할 때 황당했던 경우가 이해되는 구절도 있습니다. “옛날 통상로를 만들기 위해 길 방향을 정할 때, 발이 젖지 않을 것, 짐마차의 바퀴가 진흙에 빠지지 않을 것 등이 중요 조건이었다. 이런 길들은 보통 건조한 산등성이를 따라 나거나, 비탈과 평행을 이루며 뻗어 있다. 강을 건너지 않고는 길을 계속 갈 수 없는 상황이거나 목적지가 근처에 있을 때 길은 계곡으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다.(133쪽)” 언젠가 기회가 되면 제가 만났던 황당한 경우를 설명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자들이 이 책에 숨겨둔 비밀이 있습니다. 나오는 글에 적어 둔 삶을 살아가는 방법 혹은 학문하는 방법에 대한 조언입니다. “어쩌다가 길을 잃었을 때, 가끔 한 지역을 비껴가는 대신 훨씬 재미있는 다른 지역에 도착하는 것처럼, 학문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 사람들은 질문에 대답하는 도중에 뭔가 새로운 다른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249쪽)”는 구절이 바로 힌트입니다. 그러면서도 길잃기는 제대로 된 생존방식이 아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실제의 주변환경과 환경에 대한 생각이 서로 일치해야만 사람들은 생존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누구나 길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길을 찾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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