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 하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2
박지원 지음, 길진숙.고미숙.김풍기 옮김 / 그린비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전편에 이어 산해관에서 연경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과, 열하에 있는 피서 행재소에 거처하고 있다는 황제의 부름에 따라 열하에 다녀오는 여정이 담겨 있습니다. 황제의 탄일이 되는 만수절은 8월 13일이었는데, 6월 24일 압록강을 건넌 사신일행이 연경에 도착한 것은 8월 1일이어서 여유있는 일정이었음에도 정작 다시 열하까지 다녀오는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해야 했으니 스트레스를 엄청받았을 것 같습니다.

 

사실 책문을 떠나면서 자주 비를 만나고 강물이 넘쳐 발이 묶이는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사신단을 몰아세우는 정사 박명원의 독촉에 대하여 몇 차례 연경을 다녀온 사람들은 ‘이 지독한 더위에 이렇게 쉴 참을 거르다니,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면서 불만을 쏟아냈지만, 죽기살기로 달려서 마침내 8월 초하룻날 연경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연암의 여행기를 보면 중간 기착지마다 볼거리를 챙겨 돌아보고 느낌을 적고 있는 것을 보면 그리 빡빡한 일정은 아니었지 싶습니다. 하지만 연경에서 열하에 이르는 일정은 험난한 경로임에도 일정을 맞춰야 하기 때문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었던 모양입니다.

 

백하를 지난 다음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넌 연암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이제야 도(道)를 알았다. 명심(冥心-깊고 지극한 마음)이 있는 사람은 귀와 눈이 마음의 누(累)가 되지 않고, 귀와 눈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더욱 섬세해져서 갈수록 병이 된다. (…) 한 번 떨어지면 강물이다. 그땐 물을 땅이라 생각하고, 물을 옷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몸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마음이라 생각하리라. 그렇게 한 번 떨어질 각오를 하자 마침내 내 귀에는 강물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릇 아홉 번이나 강물을 건넜지만 아무 근심없이 자리에서 앉았다 누웠다 그야말로 자유자재한 경지였다.(175쪽)” 낮에는 시각으로 보는 위험이 캄캄한 밤에는 청각으로 듣는 위험으로 바뀌더라는 점에서 근심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마음이 태평해졌다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에 대한 판단이 먼저 마음속에서 뚜렷해지자 눈앞에 크고 작은 것에 개의치 않게 되더라는 것이지요. 깊은 산속에 있는 자신의 거처 앞을 흐르는 시내물 소리가 어떻게 들리는지에 대한 연암의 생각은 꽤나 깜찍하다고 하겠습니다. “깊은 소나무 숲이 퉁소 소리를 내는 듯한 건 청아한 마음으로 들은 탓이요, 개구리 떼가 다투어 우는 듯한 건 교만한 마음으로 들은 탓이다. 거문고가 우조(羽調)로 울리는 듯한 건 슬픈 마음으로 들은 탓이요, 한지를 바른 창에 바람이 우는 듯한 건 의심하는 마음으로 들은 탓이다. 이는 모두 바른 마음으로 듣지 못하고 이미 가슴속에 자신이 만들어 놓은 소리를 가지고 귀로 들은 것일 뿐이다.(174쪽)” 외부환경으로부터 받아들이는 자극도 마음상태에 따라서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라는 뇌과학적 견해를 이미 깨닫고 있었던 것이라 하겠습니다.

 

연암을 비롯한 당시 우리 선비들의 자연철학의 경지는 꽤 놀랄만했던 것 같습니다. 열하에서 태학에서 공부하는 사람들과 나눈 필담을 정리한 부분을 보면 우리나라에서도 지구가 움직인다는 지전설을 주장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1543년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제창하여 그때까지 천체운동의 원리로 확고하던 프톨레마이우스의 천동설을 뒤집는 변환을 이루었던 것이니 연암이 연경을 방문하던 때와 벌써 200년 이상 차이가 있고, 당시 연경에는 서양사람들이 왕래를 하고 있던 터라서 그들을 통해 전해진 서양의 천문학 지식을 접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연암의 친구 홍대용의 스승이라고 하는 김석문이라는 사람이 이미 당시보다 100여년 전에 삼환부공설을 제창하는 등 천동설을 부정하고 있었다는 것은 획기적인 것이라 하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대사상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만, 연암은 목축을 비롯한 실용부문에서의 개혁이 필요한 이유를 적고 있습니다. 청나라의 말들이 대체로 날랜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의 사정을 한탄하면서 적은 것들입니다. “우리나라가 이토록 가난한 까닭은 대체로 목축이 자리 잡지 못한 탓이다. 우리나라에서 목장으로 가장 큰 곳은 탐라 한 곳뿐이다. 그곳의 말들은 모두 원 세조때 방목한 종자로, 사오백년을 두고 내려오면서 종자를 한 번도 갈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결국 용매나 악와에서 나는 준마들이 과하나 관단 같은 조랑말이 되고 말았다.(282쪽)” 공맹을 국치의 근간으로 삼으면서 문약해진 조선이 왜란과 호란과 같은 커다란 국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은 평소 군비를 철저하게 챙기지 못한 탓 아니었을까요?

 

좁은 우리 땅을 떠나 넓은 청국에서 만나는 문물이 신기하면서도 그들의 근본이 중화가 아님에 대한 은근한 무엇도 느껴지는 여행기에 담은 연암의 다양한 정신세계를 볼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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