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를 따라 산을 오르다 - 조선 선비들이 찾은 우리나라 산 이야기
나종면 지음 / 이담북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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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레스트 산에 최초로 도전했던 미국의 산악인 조지 맬러리는 1924년 필라델피아에서의 한 강연회에서, “당신은 왜 위험하고 힘들어 죽을지도 모르는 산에 갑니까?”라는 어느 부인의 질문에, “산이 그곳에 있어 오른다(Because it is there)”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니 산에 가는 일을 ‘등산’, 높은 산에 오르는 일을 ‘정복’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산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산을 무서워할 줄 알아야 한다’고도 말씀합니다. 어느 쪽이 맞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가까운 야산의 작은 오솔길을 즐겨 찾는 수준에 만족하고 있는 저는 ‘산에 든다’고 적기도 합니다.

 

산수를 즐기셨다는 우리네 선조들께서는 산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궁금합니다. 이미 8세기 초에 혜초대사께서 천축국까지의 여행길을 <왕오천축국전>에 기록하셨던 것을 보면 보고 들은 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전통이 우리의 핏속에 면면히 이어져왔을 터입니다. 마침 한국학을 연구하시는 나종면박사가 쓴 <선비를 따라 산을 오르다>를 통하여 산에 대한 조선 선비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연전에 부안문화원이 임진왜란 직후인 17세기 초 문인 심광세의 유변산록(遊邊山錄)과 17세기 문인 김서경의 송송사상유변산서(送宋士祥遊邊山序) 그리고 19세기말 소승규의 유봉래산일기(遊蓬萊山日記)를 묶은 <유봉래산일기; http://blog.joinsmsn.com/yang412/11202235>를 읽으면서 조선 선비들의 유람이 어떠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었던 것을 조금 더 심화시켜 이해하는 계기가 될 것 같습니다.

 

사실 조선 시대 선비들의 산수유람은 독서를 중심으로 정진하던 전대의 수양방법론에 변화가 일어 몸으로 직접 경험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생겨난 결과였다고 합니다. 머리를 쥐어짜서 상상의 날개를 펼쳐 글을 짓는 것과는 달리 직접 산천을 유람하면서 사물을 눈으로 보고 느낀 바를 글로 적어내는 훈련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었습니다.

 

한자문화권에서는 기행문을 유기(遊記)라는 이름의 산문형식으로 남겼는데, 글쓴이가 자신의 여행일정을 중심으로 하여 행로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고, 산천경계를 묘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기행문은 그곳을 찾아가 보려는 사람들에게는 안내서가 되고, 찾아가기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읽을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소승규는 유봉래산일기에서 “뒷날 누워서 산수를 유람하는 읽을거리로 삼고자(와유; 臥遊)” 변산기행을 글로 남긴다 하였습니다. 이 책을 옮기신 허경진교수는 각주에서 송서(宋書) 종병전(宗炳傳)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종병이) 병이 들자 강릉으로 돌아와서 탄식하며 생각했다. ‘늙음과 질병이 함께 이르렀으니, 이름난 산들을 두루 구경하기 어렵겠구나. 이제는 마음을 맑게 하고 도를 살피며, 누워서 즐기는 수밖에 없겠다.’ 그리고서는 자신이 다니며 노닐었던 산들을 모두 방 안에 그려 놓았다.(유봉래산일기, 115쪽)” 사실은 저 역시 외국을 여행하게 되면 출발 전부터 여행과 관련된 일들을 정리하고, 여행을 하면서 보고 들은 이야기 거리를 정리해오고 있습니다. 꼭 누군가에게 읽히고 싶다기보다는 훗날 다시 꺼내 읽으면서 기억을 되살려보려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종면박사님은 <선비를 따라 산을 오르다>에 백두산, 금강산 등 조선의 명산이라 할 만한 곳을 포함하여 스물 세 곳의 산에 대한 조선 선비들의 유기(遊記)를 살펴, 산에 드는 선비들의 마음가짐과 그분들이 산수를 그려낸 솜씨를 우리 시대에 맞게 옮기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정조 때 문인, 문무자 이옥이 중흥유기(重興遊期)에 적은 산행에 관한 재미있는 계율도 있습니다. “도성의 문을 나서며 삼장의 법을 세웠다. 첫째, 시에 대한 규율이다. 둘째, 술에 대한 규율이다, 셋째 몸가짐에 대한 규율이다.(30쪽)” 조선 선비들의 산수유람은 단순히 산을 오르내리는 일에 그친 것이 아니라 산수 속에서 심성을 도야하였으며, 관리생활을 하면서도 동경했던 은일의 세계를 즐기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속리산 문장대에 오른 정조 때 문인 지암 이동항은 “천리를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한껏 다 바라보아서 속세의 티끌과 먼지들이 가득했던 가슴을 씻어내었으니, 이것이 내가 대에 올라온 목적이다.(109쪽)”라고 소감을 남기고 있습니다.

 

산수유람은 뜻이 통하는 몇몇이서 술과 음식을 챙겨 종자에게 지우고 나서게 되는데, 산수가 좋은 곳에 머물면서 술과 음식을 즐기면서 돌아가면서 시를 지어 부르기 마련입니다. 집나가면 개고생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습니다만, 문무자 이옥의 설명에 따르면 조선의 선비들의 유람길 준비도 만만치 않았던 모양입니다. “나귀나 말 한 필, 동자로서 행구를 가지고 갈 종자 한 명, 짚는 척촉장 하나, 호리병 하나, 표주박 하나, 반죽 시통 하나, 통속에는 우리나라 사라의 시권 하나, 채전축 하나, 일인용 찬합 하나, 유의 한 벌, 이불 한 채, 담요 한 장, 담뱃대 하나, 길이가 다섯 자 남짓한 담배통 하나를 준비했다. (…) 오리쯤 가서 다시 생각해보니 잊은 것이 붓과 먹과 벼루였다.(16쪽)”

 

소승규의 유봉래산일기(遊蓬萊山日記)의 경우 1897년 4월 16일부터 5월 5일까지 19일 동안 부안의 변산을 유람하면서 기록한 기행문인데, 산수의 유려함을 기록하는 한편 동행했던 소초 김은학과 동운 황치경 등 3명이 번갈아 지은 여든 세편의 시를 수록하고 있습니다. 난곡 소승규가 변산 채석강에서 지은 시를 소개하면,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

너 잡을 내 아니로다.

나 또한 욕심을 잃은 지 이미 오래니

강호 어느 곳 경치가 가장 좋던가.

白鷗翩翩莫飛去, 捕爾者非我(백구편편막비거, 포이자비아)

我亦忘機今己久, 江湖何處景最好(아역망기금기구, 강호하처경최호)


동행하는 선비들이 돌아가며 시를 짓는 경우에는 미리 떼어둔 운을 맞추어 지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시를 지을 때나 산수를 묘사할 때도 고금의 예를 인용하는 것을 보면 좋은 글쓰기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주영숙교수님이 연암 박지원의 산문을 엮은 <눈물은 배우는 게 아니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20858>의 ‘붉은 깃발을 세우라’는 제목의 글에서는 ‘병법을 이해하는 사람이 글을 잘 지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글자는 군사요, 글 뜻은 장수요 제목은 적국이다’라고 시작하는 짧지 않은 비유는 물론 ‘글 짓는 자의 걱정은 항상 갈피를 잃고 헤매거나 요령을 얻지 못하는 데에 있다.(눈물은 배우는 것이 아니다, 197쪽)’고 정리한 점까지도 쉽게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단 한 토막의 말일지라도 정곡 찌르기를 눈 오는 밤 채주에 쳐들어가듯이 할 수 있어야 한다.’거나, ‘ 또한 딱 한 마디 말로 핵심 뽑아내기를 세 번 북을 울리고 관문을 빼앗듯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은 당나라 헌종 때 장수 이소의 전략이나 춘추시대 노나라 장공 때 사람 조귀의 전략을 모르는 독자라면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독자를 위하여 설명을 더하는 친절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고문학이 어렵다는 일반의 생각은 인용하고 있는 고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 조선의 선비들의 산수유람에 따라 나서 볼까요? 요즈음이야 산에 든다고 하면 복장과 각종 장비를 갖추고 걸어 올라갈 생각을 합니다만, 조선의 양반님네들은 걸어가는 법이 없고 종자나 승려가 들어주는 남녀를 타고 가기 마련이라서 양반들의 고상한 취미는 이들의 위태롭고 힘든 노동이 뒷받침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도 산세가 험해지기 전까지는 어려움이 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옛사람의 산행기는 요즈음 사람들과는 달리 산의 초입에서부터 상세하게 그려나가기 시작하는 점이라고 합니다. 옥오재 송상기가 남긴 유계룡산기(遊鷄龍山記)에서는 동학사의 초입의 동구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동구에 들어서자, 한 줄기 시냇물이 바위와 수풀 사이에서 쏟아져 나와, 혹은 바위에 부딪혀 격하기 튀어 뿜어 나오듯 흩어지기도 하고, 혹은 널찍하게 깔려서 잔잔하게 흐르기도 하며, 빛깔은 하늘처럼 푸르다. 바위 빛깔도 역시 창백하여 사랑스럽다. 좌우의 단풍나무 붉은색과 소나무의 비췻빛은 그림처럼 점철되어있다.(101쪽)”

 

이와 같은 산의 초입에 옛사람들의 관심이 지금과 다른 이유를 남종면박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옛사람들의 입산은 산의 입구에서부터 이루어진다. 평지와 산이 만나는 접점, 즉 산의 입구를 초도(超道)라 부르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저 현실세계[속세]의 넝쿨처럼 질기게 얽힌 인연[반연(攀緣)]을 뛰어넘어야만 올바른 수양이 시작된다고 본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냄새나는 것, 느껴지는 것을 억지로 차단하지 않아도 초도를 지나는 것 자체가 외부를 차단하며 끊는 것이다.(18쪽)” 당연히 산의 초입에서부터 마음을 다듬어 산에 서려있는 신령한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하였을 것입니다.

 

슬로우 어답터라고 할 수 있는 저는 아직까지도 금강산구경을 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당 이상수의 동행산수기(東行山水記)를 더욱 꼼꼼히 읽었는지도 모릅니다. 금강산을 돌아 배를 띄우고 해금강까지 돌아본 어당이 해금강의 수려한 풍광을 세세하게 묘사한 끝에 “하늘의 신기한 기운이 세차게 달려 동으로 모여들어 만 이천 봉우리를 크게 벌이어 놓고 바다에 닿아서 끝이 나며 그 나머지로 기교를 베풀어 놓은 것이 의당 이와 같다.(172쪽)”고 하였으니 그저 읽는 것만으로는 양에 차지 않음을 절감하게 됩니다.

 

여기 더하여 저자는 어당이 산수를 오래 관찰하여 사색하여 내린 다음과 같은 결론을 전하고 있습니다. “산수란 자신의 마음에 따라 만 가지 모습으로 보일 수가 있다 이미 자신의 칠정(七情)이 변한 상태에서 산수를 보면 산수도 칠정에 따라 변한다. 산수는 미추(美醜)가 없으므로, 자신의 감정을 개입하지 않는 평정 상태를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산수는 스스로 신령해질 수 없다. 산수는 사람이 신리(神理)로 만나는 것이다. 산을 온전히 보고자 한다면, 다가가서 그 골체(骨體)를 보고 떨어져서 그 신리를 보아야 한다. 마주 보고 등짐에 따라 취(趣)와 태(態)가 모두 다르니, 높은 안목과 세심한 마음으로 품평을 정밀히 해야 한다. 또 부족한 점을 알아야 하고, 빼어난 곳을 지날 때면 그 요점을 터득해야 할 뿐이다. 갑자기 매우 장대한 것을 보았다고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된다.(173쪽)” 어떻게 공감이 되십니까?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사우스다코타주에 있는 배드랜드(Badland) 국립공원을 세 차례나 방문하였습니다. 구경할 곳이 많은 탓에 같은 곳을 두 번 볼 여유가 없던 시절인데 유일하게 반복해서 찾은 곳이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맑은 날 황혼 무렵에 처음 찾은 배드랜드는 넓게 펼쳐진 초원 한 복판에서 갑자기 드러나는 황량한 모습으로 나타나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리도 그 충격은 근처를 지나는 여행일정을 짤 때마다 발길을 당겨, 한번은 맑은 날 아침 무렵에, 그리고 한 번은 안개가 자욱한 날에 이곳을 더 찾게 만들었습니다. ‘산수란 자신의 마음에 따라 만 가지 모습으로 보일 수 있다.’고 한 어당의 말씀과는 달리 배드랜드는 다양한 분위기를 스스로 연출한다고 느꼈던 것 같습니다. 다시 배드랜드를 찾게 된다면 어당의 말씀을 이해하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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