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정의를 말하다 - 셰익스피어 희곡에서 배우는 정의
켄지 요시노 지음, 김수림 옮김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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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간의 융합이 화두가 되고 있는 시대에서 법학과 문학 역시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는 무언가를 발견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학의 전통적인 분위기는 “법조인이라면 무릇 ‘가공의 이야기에서 배우는 정의’ 대신 ‘있는 그대로의 정의’를 논해야 한다는 것.(9쪽)”인 모양입니다. 사실 법이란 대다수의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판결을 통해서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목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욕대학교 법과대학의 켄지 요시노교수님은 법과 문학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역할을 하고 계시는 대표적 인물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가진 생각을 설파할 최적인 ‘힘의 언어’, 즉 법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였지만, 젊어서는 영문학교수가 천직이라는 생각을 가질 정도로 열혈문학청년이었던 영향이 남아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직도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단편적으로 밖에 접해보지 않았습니다만, 셰익스피어의 광팬을 자처하는 저자는 “셰익스피어의 작품 세계는 삼라만상을 망라하고 있다. 그곳에는 내가 아는 모든 언어, 내가 만나 본 모든 인간유형, 내가 해 본 모든 생각이 빠짐없이 담겨 있다.(12쪽)”고 설파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셰익스피어가 현대에도 풀지 못한 수많은 정의에 관한 담론들을 그 시절에 고민했고, 자신의 생각을 온 세상에 널리 전했다(14쪽)”는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셰익스피어의 작품세계를 천착함으로써 ‘가공의 이야기에서 배우는 정의’를 탐구한 결과를 이 책 <셰익스피어, 정의를 말하다>에 담아내게 된 것입니다.

 

희곡은 소설과 같은 다른 문학작품과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즉, 작가가 생각하는 주제가 희곡의 형태로 독자를 만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희곡이 연극이라는 형태로 만들어져 관객에게 전달되는 경우에는 작가가 생각하는 세계는 연출 작업을 통하여 해석되고, 그 해석을 배우라는 객체의 표현을 통하여 전달되기 때문에 작가가 처음 생각했던 바가 변형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말을 하지 않고 몸짓을 통하여 뜻을 전달하는 게임처럼 원래의 말이 끝에 가서는 전혀 엉뚱하게 변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지난 년말 극단 목화가 오태석 선생님의 재해석으로 무대에 올렸던 <템페스트; http://blog.joinsmsn.com/yang412/12493038>의 공연 느낌을 참고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저자는 <티투스 안드로니쿠스>, <베니스의 상인>, <자에는 자로>, <오셀로>, <헨리아드>, <맥베스>, <햄릿>, <리어왕>, <폭풍우> 등 모두 여덟 편의 셰익스피어 희곡에 담긴 정의를 논하고 있습니다. 특히 <티투스 안드로니쿠스>, <베니스의 상인>, <자에는 자로>, <오셀로>, <헨리아드>에서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담긴 정의의 실체를 논하면서 동시에 우리 시대에 있었던 인물과 사건을 비교해보고 있어 읽는 재미를 더하고 있습니다.

 

개인 사이에서 벌어진 사소한 사건이 확대되어 집안 사이에 대를 이어 죽음의 복수가 이어지는 것이 정의이던 시절이 있습니다(멜라니 킹 지음, 거의 모든 죽음의 역사; http://blog.joinsmsn.com/yang412/12436588). 셰익스피어의 비극 <티수스 안드로니쿠스>에서 반복되는 복수의 실체를 논하면서 9.11 사건 이후 미국이 벌인 아프간전쟁이 과연 정의라 할 수 있는가는 논하고 있는 점이다.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포샤의 명쾌한 법해석과 현란한 말의 성찬이 과연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타당한 것인지를 논하면서 클린턴이 섹스스캔들에서 매끄럽게 빠져나가는 모습을 비교한 점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리고 2009년 소니아 소토마요르 부연방대법관의 인준청문회와 연관지어 <자에는 자로>를 비교하여 판사의 자질을 논하면서 거론하는 ‘지혜로운 판결의 비결’에 주목하였습니다. “고대부터 지금까지 존재하는 모든 판결은 모두 다음 세 종류의 판결로 분류할 수 있다. 한쪽의 처지를 과도하게 공감한 나머지 법치주의를 훼손한 판결, 법치주의의 확립, 즉 ‘법문의 자구’에 충실한 ‘엄격한 해석’에 집착한 나머지 한쪽에게는 너무 가혹한 처분을 내린 판결, 마지막으로 사안이 법치주의의 관철과 감정이입 그 어느 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골치 아픈 상황이라는 것을 통감하고 내린 판결, 이 세 종류의 판결이 그것이다.(116쪽)” 결국 법의 엄정한 집행과 감정이입이라는 두 가지 상충하는 가치는, 이 어려운 임무를 영원히 풀 수 없는 숙제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인데 결국 해답은 중용(中庸)의 도에 있다는 점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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