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집 2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전편에서는 등장인물들이 따로 무리를 이루어 상황이 전개됩니다. 고요한 집에서는 파트마가 레젭에 대한 평소의 불편한 심기가 점점 고조되고, 고인이 된 남편 셀라하틴이 생전에 벌인 일들이 고요한 집, 그리고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 위축되는 모습이 파트마의 회상을 통해 점차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셀라하틴이 하녀로부터 얻은 아들 레젭은 파트마의 아들 도안의 도움으로 독립할 수도 있었을 터인데 고요한 집에 남아 매사에 트집을 잡고 있는 파트마를 돌보는 것은 난장이라는 신체적 요인과 셀라하틴이 생전에 남긴 파트마에게 잘하라는 유지에 따르는 이외의 다른 복선은 없어 보입니다. 등장인물들 가운데 가장 순수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셀라하틴과 그 아들 도안이 그랬듯이 파룩은 소위 지식계층의 주류에 진입하지 못하고 낙오한 자신들의 위치를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술로 달랬던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등장인물들 가운데 현실에 가장 적극적인 사람은 고요한 집의 3대에 해당하는 메틴과 레젭의 조카 하산입니다. 메틴은 할머니 파트마의 보석을 팔아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하여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정착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할머니의 고요한 집을 재건축하여 아파트를 지어서 자금을 만들 생각으로 할머니를 설득하지만 주변의 변화가 싫은 파트마는 요지부동인 것 같습니다.

 

한편 어릴 적 친구들인 이곳 상류층 아이들과 어울리는데, 이들이 모여서 하는 짓들이라는 것이 술마시기, 차를 몰고 다니면서 경주하기, 고속도로에서 다른 차를 위협하기, 바다에서도 보트를 난폭하게 운전하기 등등, 어느 사회에서도 볼 수 있는 일탈한 모습을 보이는 젊은이들의 전형을 볼 수 있습니다. 파묵은 젊은이들의 이런 방종한 모습에 대하여 긍정적이지 않다고는 하지만 작품을 통해서 이들에 대하여 제제를 가하지 않고 방임하는 모습은 의외라 하겠습니다. 작가의 방임주의는 이어서 정리할 하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메틴이 어울리는 그룹에서 제일란에게서 사랑을 느끼게 되는데 그런 사랑을 로맨틱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폭력적으로 접근하다가 냉정하게 거절당하고서야 좌절하게 되고, 그 끝에 하산네 그룹과 부딪치는 상황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는 하산 역시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하산은 공부에 집중하라는 아버지 이스마일의 당부는 애당초 관심 밖이고 반공산 민족주의를 앞세우는 젊은이들과 어울리면서도 고요한 집에 온 닐귄에게 꽂혀 그 뒤를 쫓게 되는데, 같이 어울리는 친구들이 사랑에 빠졌느냐는 비아냥을 피하기 위하여 그녀가 공산당이라는 사실을 발설하고 마는데, 이런 이념적 갈등은 그녀와의 관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하산 역시 메틴과 마찬가지로 닐귄을 뒤쫓다가 거리에서 사랑을 고백하는데 “이 미친 파시스트, 날 놔줘”라는 그녀의 답변을 듣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면 메틴이나 하산이나 여성에 대하여 참 무지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터키 젊은이들은 다 그런가요? 닐귄의 답변에 놀란 하산은 그녀에게 벌을 가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녀를 무자비하게 구타하게 되는데, 이런 모습에서 터키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를 엿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결국은 닐귄의 죽음으로 이어지게 됩니다만 구타를 당해 부상을 입은 사람에 대한 구호에 무관심한 것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가족들 간에 관심이 별로 없는 탓일까요?

 

지정학적으로 보면 터키는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교량과 같은 곳입니다. 당연히 상황에 따라서는 동양문명과 서양문명이 충돌하거나 교류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명이 부딪히는 모습보다는, 유럽문명에 경도된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는 점도 의외라면 의외일 수 있겠습니다.

 

파트마씨는 닐귄의 죽음을 예감이라도 하듯 셀라하틴이 죽음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던 장면을 떠올립니다.(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맞는 이야기인지 헷갈렸던 것 같습니다.) 셀라하틴이 발견했다는 서양과 동양를 구분하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은 바로 “죽음이라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우물을, ‘무’를 자각한 것”이라고 하는데, 천년 동안이나 거대한 동양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셀라하틴은 주장했던 것입니다(217쪽). 사실 저자의 이러한 주장에 헷갈린 것은 죽음에 서 ‘무’라는 개념을 정립한 것은 서양이 아니라 동양이 아니던가요?

 

정리를 해보면, <고요한 집>은 전작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에서처럼 터키사회가 안고 있는 제반문제를 압축하여 전하고 있는데, 전작에 비하면 극적인 갈등을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다소 차이가 있지만, 여전히 차분하고 상황의 기록자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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