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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9 - 갇힌 여인 ㅣ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9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창석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1998년 2월
평점 :
품절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8부 능선에 해당되는 ‘갇힌 여인’은 마라톤으로 치면 마지막 고비에 해당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4부까지는 두 권으로 나뉘었던 것을 578쪽이나 되는 한권으로 묶었으니 일단은 두텁다는 느낌이 드는데다가, 알베르틴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전체 스토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간에 알베르틴이 꼬투리가 되어 방문하게 되는 베르뒤렝부인의 살롱파티에서 샤를뤼스씨와 모렐과의 관계가 파경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다가, 발베크에서 같이 지내다가 파리로 돌아와 같이 살게 되는 알베르틴과의 관계 역시 그녀가 동성애에 탐닉하는 속사정을 감춰왔던 사실이 드러나면서 파탄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어, 어쩌면 전편 ‘소돔과 고모라’에서 풀어놓았던 남성과 여성의 동성애에 대한 당시 사회의 부정적 인식의 일면을 정리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알베르틴의 행적에 대한 주인공의 의심과 감시가 지루할 정도로 이어지고 있어 다시 마라톤경기에 비유하자면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가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코스 가운데 마지막 난코스 몬주익언덕에 해당된다고 하겠습니다.
프루스트가 주변에서 일어나는 상황에 얼마나 예민했던가는 매 스토리를 여는 대목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갇힌 여인’은 다음과 같이 시작됩니다. “아침 일찍, 얼굴을 아직 벽 쪽으로 돌린 채, 창문의 커다란 커튼 뒤쪽으로 새어드는 빛살이 어떤 빛깔인지 보지 않아도, 나는 이미 날씨를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요? “한길에서 맨 처음 들려 오는 소리가, 습기로 부드럽게 굴절되어 들여 오는지, 아니면 차갑게 밝아진 드넓은 아침의, 높게 울리는 공허한 공간을 화살처럼 떨면서 들려오는지에 따라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사소한 변화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모두 기억에 담아 두고 차이를 비교해야만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고 미묘한 차이까지도 인식할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고 한다면 주변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에 민감한 주인공이(사실 주인공이 바로 프루스트라는 사실은 ‘갇힌 여인’에서 알베르틴이 공공연히 언급함으로써 밝혀지게 됩니다.) 선병질적일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주인공 역시 여러 차례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만, 당시에도 미혼의 남녀가 같은 집에 동거한다는 것이 남의 입초시에 충분히 오를 가십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어머니도 아픈 친척을 간병하기 위하여 콩브레에 가있는 상황에서 주인공이 알베르틴을 파리의 집으로 데려와 같이 지내겠다는 결정을 내린 배경이 아리송하다는 것입니다. 질베르트나 게르망트부인에게 향하던 연심을 접는 과정에서 단호하고 쿨한 성격이구나 싶었던 주인공은 알베르틴과의 관계에서는 애매모호하다는 것입니다. 알베르틴의 숙모의 부탁으로 알베르틴의 동성애적 성향을 바로 잡기 위하여 파리로 데리고 가서 동성애 상대들과의 접촉을 차단하기 위하여 동거를 시작했다고 설명하면서 그녀의 관심이 자신을 향하도록 하기 위하여 게르망트공작부인의 조언을 받아 새옷을 사주는 등 어머니의 걱정을 들을 정도로 돈을 쏟아붓는 태도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점이기도 합니다.
절절한 사랑을 고백하는가 하면 어느 순간에서는 알베르틴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고백하기도 하는, 다중인격이 의심되는 대목을 곳곳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태양의 송가를 노래하는 나의 내부의 꼬마 인물 쪽이 그녀보다 더 많은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을 아는지라, 우선 엄라 동안 이 인물과 상면을 즐기는 게 예사였다. 한 개인은 허다한 인물로 형성되는데, 그 중에서 가장 표면에 나타나는 자라고 해서 반드시 가장 본질적인 자는 아니다.(11쪽)”
그런 점에서 주인공은 알베르틴 역시 다중인격을 가진 것으로 오해하기도 하는데, ‘갇힌 여인’을 모두 읽고 나면 알베르틴은 치밀하게 계산된 행동을 하지만 자신이 한 말을 모두 기억하지 못하여 비밀을 스스로 내뱉어 스스로 발목을 잡는 짓도 저지르는 구석도 있어 단순한 성격으로 보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시작된 남녀 동성애자의 성향은 동성간의 관계가 주를 이루다가 ‘갇힌 여인’에서는 모렐과 쥐피앙의 질녀와의 관계를 비롯해서 주인공과 알베르틴과의 관계 등 주요등장인물들의 양성애(兩性愛) 성향을 그리고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동성애 성향이 있는 사람들은 이성에게서는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고 들었습니다만, 프루스트는 스토리 구성의 다양함 때문에 양성애 성향으로 구성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 더 헷갈리는 점은, 세월이 꽤나 흐른 탓인지 죽음을 맞아 이야기 흐름 속에서 사라지는 인물들이 많아지고 있는데, 문제는 앞에서 죽었다고 언급한 인물이 뒤에서 다시 등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아 참, 그 말씀인데, 애도의 뜻을 표하는 걸 까맣게 잊었군요. 불쌍하게도 그 선생(코타르)이 그렇게 급사할 줄이야!(320쪽)”, 라고 했는데, “샤를리의 서훈에 큰 발언권을 가질 수 있는 이 인물이, 코타르에게 건강 상담을 몇 마디 물어 본 다음 총총히 돌아가는 참이었다.(371쪽)”, “커타르가 왜 안왔는지 아시오? 사니에트의 곁에 있었기 때문이야.(436쪽)”고 다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등장인물이 많은 대하소설의 경우 등장인물을 관리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박경리선생님의 대하소설 <토지>에서는 이런 상황을 본 기억이 없어 참 대단하시단 생각을 했던 것과 대조적인 상황이라서 당황스럽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