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 - 게르망트 쪽 1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창석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1998년 2월
평점 :
품절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반환점이 멀리 보이는 부분에 도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읽은 것만으로 섣불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었노라는 자부해서는 큰 잘 못이라라는 점을 옮긴이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1편의 ‘스완네집쪽으로’에서는 콩브레에 있는 고모네 집 동네의 아름다운 정경을 서정적으로 그려냈고, 2편의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에서는 휴양지 발베크 바닷가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만남을 그렸는데, 지금까지 설명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하여 앞으로는 인간 내면에 대한 심오한 탐구가 전개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3편 ‘게르망트쪽’의 전반에서는 제목처럼 게르망트 공작부인을 향하는 연심을 적극적으로 나타내려는 ‘나’의 행보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면 2편 전반에서는 스완의 딸 질베르트에 대한 사랑으로 몸살을 앓다가 시나브로 사랑의 불꽃이 사위어들고, 후반에서는 발베크에 이르는 동안 등장하는 여인들, 특히 알베르틴과 그 동무들에게 시선을 빼앗기는 등 ‘나’의 연애관이 상당히 부박한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는데, 3편에서는 제목에 드러난 것처럼 갑작스럽게 게르망트 공작부인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어 읽는 이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집요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데, 잠시라도 그녀의 시선을 끌기 위하여 그녀의 산책길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라던가, 그녀와의 만남을 주선하기 위하여 발베크에서 친분을 쌓은 로베르 생 루가 근무하고 있는 동시에르를 방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공작부인을 향하던 연심도 분명치 않은 이유로 가라앉는 모습을 보여 여성에 대한 ‘나’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천주님께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최대의 행복은, 천주님께 부인에게 온갖 재앙을 내리시어, 망하게, 인망을 잃게, 나와 부인 사이를 떼어놓고 있는 모든 특권을 빼앗아, 거처하는 집도, 인사해 주는 사람도 없이 되어, 부인이 내 보호를 구하러 오게 하는데 있었다.(83쪽)”는 나의 사랑은 병적인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러한 ‘나’의 모습은 1편 ‘스완네집쪽으로’에서 그려내고 있는 오데트에 대한 스완씨의 집요한 구애라던가 3편 ‘게르망트쪽’에서 ‘나’의 친구 생 루가 실상은 매춘부인 라셀 캉 뒤 세뇌르라는 연극배우에게 빠져드는 모습과는 비교되는 것 같습니다.

 

이야기는 게르망트 공작부인과의 친분을 얻어 ‘나’의 연심을 전하기 위한 방법을 찾는 것처럼 전개되지만 이야기의 핵심은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커다란 이슈가 되었던 드레퓌스 사건으로 사회가 양분되어 팽팽하게 맞섰던 것을 담아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위키백과사전이 소개하는 드레퓌스사건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894년 프랑스 육군의 포병대위였던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독일스파이 페르디낭 에스테라지 소령이 작성한 문건이 발각되면서 간첩으로 몰려 반역죄로 기소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프랑스령 기아나의 악마섬에 유폐됩니다. 2년 뒤 조르쥬 피카르 중령이 또다른 간첩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에스테라지가 간첩이며 드레퓌스에게 뒤집어 씌웠다는 것을 상부에 알렸지만 오히려 피카르 중령이 체포되고 범인은 또다시 빠져나가게 됩니다. 군부의 고급 장교들은 자신들의 실수를 덮기 위하여 드레퓌스를 유죄로 몰고 간 것이며, 가톨릭교회와 보수주의언론은 당시 프랑스 사회에 자리하고 있던 반유대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역시 드레퓌스가 유죄라고 몰아붙였던 것입니다.

 

드레퓌스가 악마섬에 유배되어 있는 동안 프랑스에는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는 드레퓌스파와 반유대주의를 주장하는 반(反)드레퓌스파로 완전히 양분되었는데, 에밀 졸라를 비롯하여 아나톨 프랑스, 앙리 푸앵카레, 장 조레스 등 많은 진보적인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드레퓌스파는 프랑스 군부와 정부를 비판하였고, 결국 1898년 에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재심이 이루어지지만 종신형에서 10년형으로 감형되었을 뿐 유죄가 번복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면은 되었지만 복권은 되지 않은 드레퓌스는 1904년이 되어서 다시 청구된 재심을 통하여 1906년에 이르러서야 무죄가 선고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테오도르 헤르출을 중심으로 시작한 시오니즘운동은 약속의 땅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을 건국하기에 이릅니다.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를 통하여 프루스트는 사교계에서 그리고 병영에서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각자의 견해를 같이 하는 사람들끼리 자연스럽게 뭉치고 대립하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나’가 프루스트 자신이라고 한다면 그는 당시 프랑스 지성인 대부분이 속하던 드레퓌스파에 속한다고 보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