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밀란 쿤데라 전집 10
밀란 쿤데라 지음, 박성창 옮김 / 민음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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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두 아들을 이끌고 낯선 땅 미국에서 생활을 시작할 무렵이니 벌써 20년도 넘어 정말 오래전 일입니다. 병원에서 막 배우기 시작한 일도 벅찼지만 가족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일을 처리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큰 아이 역시 말도 통하지 않는 학교생활이 힘겨운 눈치였습니다. 그나마 작은 아이는 세 살을 넘겨 아직 어린 탓인지 그럭저럭 지낼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작은 아이와 집에 있는 아내였습니다. 작은 아이가 낮잠에라도 들면 멍한 느낌이 들고 창문 밖 하늘에 비행기라도 지나가면 서울 생각 때문에 미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몇 달이 지난 다음에서야 넌지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향수가 지나치면 병이 될 것을 걱정해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우리말을 쓰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만들면서 아내의 문제도 사그러들었습니다. 교회에 나가는 것도 미국 생활에 익숙해지면서부터 주말여행을 떠나면서 뜸해지기는 했습니다만, 결정적인 시기에 큰 도움이 된 것입니다.

 

아이들은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만, 기억에 든 것이 많은 어른들은 살고 있는 곳을 떠나 낯선 타향에 머물게 되면 고향에 대한 기억이 점점 더 생생해지면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쿤데라는 다른 의견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뒤에 남겨둔 시간이 거대하면 할수록 우리에게 되돌아갈 것을 권유하는 목소리는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이런 격언은 자명한 이치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틀렸다.(…) 향수가 가장 강할 때는 소년기, 즉 지나간 삶의 부피가 대단히 적을 때다.(82쪽)” 밀란 쿤데라의 <향수>는 소련 공산주의에 점령당한 조국 체코에서 구속되는 삶을 견딜 수 없어 망명을 선택한 이레나와 조제프가 붉은 군대가 물러나고 공산당이 몰락한 조국에 돌아가서 느끼는 생경함을 그리고 있습니다.

 

쫓기듯 떠난 체코 망명객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고 합니다. 공산당이 점령하고 있는 체코로 돌아가는 꿈을 꾸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난 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레나는 여기에 더하여 낮만 되면 조국의 풍경의 환영들이 그녀의 머릿속에 느닷없이 떠올랐다가 빠르게 사라지는 것입니다. 상사와 이야기하고 있는 도중에 들판으로 난 길이 섬광처럼 나타거나 전철에서 떠밀리는 순간 갑자기 프라하의 녹지대에 있는 조그만 길이 눈앞에 펼쳐진다거나 하는 식입니다. 이와 같은 짧은 고향의 이미지는 무언가 부족한 듯한 그녀의 정신을 채워주는 역할을 했지만, 그녀는 해방된 조국에 돌아갈 결심을 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같이 체코를 탈출한 남편 마르틴이 죽은 다음 어렵게 버틸 때, 스웨덴에서 온 남편의 사업파트너 구스타프와의 만남은 그녀에게는 구원과 같은 것이었고, 구스타프가 체코에 사업을 열게되면서 프라하에 돌아가게 되는 이레나는 돌아온 고향이 생경하고 남아있던 친구들 역시 예전같지 않다는 사실에 당황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시간의 간극은 사람들의 생각까지 바꾸는 것일까요? 아니면 같은 공간에서 힘든 시간을 같이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묘한 적의(敵意) 같은 것이었을까요? 하지만 작가는 핏줄의 의미를 넘어서는 것을 경계한 듯 합니다. 고향의 동무들은 그들이 기억하는 것을 그녀도 기억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우리는 같다는 것을 인식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가 파리에서 무얼 했는지에 대하여 철저하게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는 것입니다. 바로 친구들을 초대한 만찬에서 친구들은 이레나가 준비한 보르도산 포도주를 거부하고 체코 맥주를 선택한 것은 오랜 세월이 지나 변한 이레나의 모습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래서 가수 김광남은 ‘고향에 찾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로고...“하고 노래불렀는지 모릅니다.

 

한편 프라하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만난 조제프는 돌아온 고향에서 철저한 이방인 취급을 받게 됩니다. 공산당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던 조제프는 한때 위험인물로 몰리기도 했지만, 친구 N의 도움으로 혐의를 벗고 결국은 덴마크로 망명하게 되는데, 당원이었던 형의 가족들의 눈에 조제프는 가족을 버리고 자신의 행복을 쫓아 달아난 탕아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이레나나 조제프 두 사람은 병이 될 지경으로 고향을 그리워하지만 돌아온 고향은 물론 가족까지도 그들을 반기지 않는 비극적 현실을 작가는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서로를 연결하는 고리가 없이 등장하는 것 같은 이레나와 조제프는 젊어서 만났던 적이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게 되는데, 이레나는 그때를 기억하고 있지만, 조제프의 기억에 이레나는 존재하지 않는 차이가 있다는 것도 드러나게 됩니다.

 

저자는 떠나온 조국 체코에 대한 두 사람의 감정을 설명하면서 곳곳에서 오디세우스가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여정과 그가 고향에 도착해서 얻은 새로운 감정들을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향을 떠나있는 동안에는 오직 자신의 귀환만을 생각했지만 일단 고향에 돌아오자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삶, 그 삶의 본질, 그 중심, 그 정수가 이타카 밖에, 이십년 동안의 방랑 속에 있음을 깨닫고 놀라게 되는 것입니다.

 

쿤데라의 <향수>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생각이 주목되는 이유는 우리사회에 이들과 같은 분들이 같이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북에 있는 고향을 떠나올 때는 각자 사정들이 모두 달랐겠지만, 그 분들이 남한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겪는 생각과 생활의 차이는 어쩌면 <향수>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겪는 차이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되돌아갈 수 없는 그분들을 우리 사회가 보듬어 안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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