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눈물을 닦다 - 위로하는 그림 읽기, 치유하는 삶 읽기
조이한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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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마다 열리는 스포츠 제전이 3일 뒤 런던에서 그 화려한 막을 열릴 예정입니다. 스포츠와 눈물을 뗄 수 없는 관계인 것 같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불운에 눈물을 흘리는 선수가 있는가 하면, 승리를 맞는 순간 그 감동에 혹은 그동안 인내해온 고통에 대한 상념이 교차하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선수도 그렇지만 그 선수를 지켜보는 관중이나 시청자 역시 저도 모르는 사이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과학자는 거울세포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경기 내내 선수와 함께 한 긴장이 감동으로 연결되면 절로 눈물이 쏟아질 수밖에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소설, 영화, 연극과 같이 스토리가 있는 문학과 예술 부문에서 독자가 혹은 관객이 눈물을 흘리는 경우는 아주 많습니다. 음악을 듣다가 눈물을 흘리는 경우도 적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스토리를 따라가면서 감정이 이입되거나 음악을 들으면서 감정이 점차 고조되면서 울컥하는 순간에 이르기 때문일 듯합니다. 그런데 적어도 제 경우는 미술작품을 감상하면서 눈물을 흘린 기억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미술작품을 감상하면서 눈물을 흘린 사람들과 그 분들의 눈물과 인연이 된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미술사가 제임스 엘킨스교수의 <그림과 눈물; http://blog.joinsmsn.com/yang412/12435742>을 읽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림을 대하면서 눈물을 쏟았다는 분들이 왜 그렇게나 많은지....

 

그림과 눈물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또 하나의 책을 읽었습니다. 이번에는 에세이라서 아마도 눈물과 인연이 있는 그림에 관한 소회를 담은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미술사를 가르치는 조이한교수님의 <그림, 눈물을 닦다>입니다. 그런데 ‘위로하는 그림읽기 치유하는 삶읽기’라는 부제가 달린 것을 보면 상처받은 사람의 마음이 미술을 통해서도 치유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어깨를 짓누르는 삶의 고달픔에 상처 난 마음을 감추고 ‘난 괜찮아’하는 최면으로 버티는 것보다는 자기의 감정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눈물을 흘리는 편이 낫다는 출판사의 주장이고 보면 그림을 통해서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는 방법으로 눈물을 흘린다거나 하는 등 감정의 풀어낼 필요가 있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림으로 눈물을 닦는 것’이 아니라 ‘그림감상을 통해서 눈물을 흘리도록 하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자 역시 엘킨스 교수의 <그림과 눈물>을 인용하고 있습니다만, 에곤 실레의 작품 <해바라기>를 처음 보면서 눈물을 쏟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죽을 것만 같아서 도망치듯 시작한 독일 유학이니 낭만은커녕 하루 버티기도 힘들어 오기로 버틸 때 만났던 <해바라기> 앞에서 저자는 바로 자신을 만난 것 같았다는 것입니다. “여름 내 쏟아져 내린 뙤약볕 아래서 마지막 수분 한 방울마저 공기 중으로 날아가 버렸지만 해바라기는 서 있다. 금방이라도 바스러져 버릴 것만 같은 이파리. 까맣게 타 버린 씨앗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버티고 선 모습. 해바라기의 자존심. 내가 거기서 본 것은 해바라기가 아니라 내 모습이었다.(204쪽)”

하기야 제가 보기에도 굵은 해바라기 줄기에 축 늘어져 있는 꽃과 말라붙은 이파리는 마치 신산한 삶에 굴복하고 목을 매단 채 늘어져버린 주검 같다는 느낌을 받았으니 힘들고 어려울 때 만난 이 그림이 저자에게 준 의미를 새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목을 읽으면 마치 눈물에 관한 미술작품에 대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만, 소설, 시, 영화, 사진, 조각 등 전방위적 예술작품을 이끌어다 눈물, 즉 고단한 삶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것들이라면 어느 것이든지 그녀의 관심이 미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작품 뿐 아니라 작가의 생애에 이르기까지 독자의 이해를 넓힐 수 있는 사실들을 인용하고 있어 저자는 역시 ‘미술’에 방점을 찍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습니다.

 

조금 아쉬웠던 것은 엔소르의 <가면>을 설명하면서 인용한 사진작가 질리언 웨어링의 사진작품 <나는 절망적이다>의 소개에 이어 ‘감정노동’에 대하여 설명하면 자본주의의 키치적 비유를 끌어온 것처럼 묘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부분입니다. 사실 서비스에 종사하는 분들이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면서 직무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에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주장에 대하여 저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업무를 수행하면서 누군가는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일을 하지만 누군가는 그 일을 사랑하고 즐기면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업무관련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은 그 일을 그만두고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 때문에 그 일을 사랑하고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놀고 있다면 이는 서로에게 불행한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미술작품을 해설하면서 때로는 설명에 앞서 각자의 견해를 듣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림을 그린 이의 작품설명을 듣게 되는 경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결국은 각자가 느낀대로 감상하기 마련이므로 정말 다양한 의견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미술평론가 역시 일반인보다는 차원이 다를 것이나 경우에 따라서는 자의적 해석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예를 들면,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의 <무제>의 경우, “사진에는 마치 조금 전 사랑을 나누었던 것처럼 두 사람의 무게에 눌린 배게와 흐트러진 시트가 찍혀 있다.(107쪽)”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사진은 두 사람이 나란히 누워 잠을 잔 흔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지 않나 싶습니다.

 

마크 로스코의 <무제>의 경우는 앞서 언급한 엘킨스교수가<그림과 눈물>에서 이 그림을 보면서 우는 사람이 많았다 해서 인용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의 그림에서도 진한 슬픔이나 절망적인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따지고 보면 슬픔은 형체가 없는 것이므로 추상미술에서 감정을 느끼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 않겠느냐는 저자의 물음을 로스코가 들었더라면 분명 화를 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정작 로스코는 자신을 사실주의적 화가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필립 라메트의 작품 <사물들의 자살>을 놓고 자살을 논하면서 우리 사회가 자살을 강요하는 사회라는 자조적인 논리 혹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전(前) 대통령이 떠오른다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작가의 특정한 의도가 읽혀지는 듯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막대기를 들고 싸우는 사람들>에 붙인 “내가 죽지 않으려면 너를 죽여야만 하는, 그렇게 누군가 하나 죽을 때까지 서로를 쳐야만 하는 비극, 이 잔인한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싸움을 계속 한다.(150쪽)”라는 설명에 작가가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은 편향되어 있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최근에 읽은 로저 킴볼의 <평론, 예술을 엿 먹이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66017>의 영향을 받은 탓일까요? 제가 보기에도 고야의 그림에 등장하는 두 남자가 들고 휘두르는 막대기의 모양새로 보아 서로에게 치명상을 주기에는 가냘프게 보인다는 느낌이라서 그렇습니다.

 

정리해보면, 고달픈 삶에서 오는 고통을 치유하는 방법으로서의 미술은 분명 가능한 길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그 길을 안내하는 분들이 제대로 역할을 해주어야 하겠다는 생각도 곁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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