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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팔기에 좋은 날 - 곽세라 힐링노블
곽세라 지음 / 쌤앤파커스 / 2012년 6월
평점 :
어느 날 문득 ‘힐링’이란 외래어가 우리 생활 속에 스며들어왔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의 치료와 관련해서 ‘큐어’와 ‘케어’의 차이를 가끔씩 설명하곤 합니다. 큐어는 질병을 치료하여 환치시키는 행위를 이르나 케어는 완치시킬 수 없는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를 돌보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힐링(healing)이라는 개념은 다음 영영사전에 “tending to cure or restore to health”이라 되어 있어 몸이나 마음을 치유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으나 제가 느끼기에는 마음을 치유한다는 쪽이 가깝지 않나 싶습니다.
이와 같은 사회적 현상을 반영한 듯 SBS에서는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예능프로그램을 통하여 출연자가 패널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심리적 갈등 혹은 부담 등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는 것 같습니다. 이미 폐지되었습니다만, MBC의 <황금어장>의 메인 프로그램이었던 <무르팍도사>가 유사한 프로그램이라 하겠습니다.
이렇듯 ‘힐링’이라는 개념을 적용하는 분야가 확대되고 있는 분위기는 문학계에까지 이르러 ‘힐링노블’이라는 새로운 영역이 등장한 것 같습니다. 언젠가 책읽기를 환자의 질병치료에 활용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암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독서치료; http://blog.joinsmsn.com/yang412/12549788>를 읽었습니다만, 힐링노블은 어떤 치료효과를 가지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곽세라작가님은 한국을 대표하는 힐링 라이터로 지목된다고 해서 그녀의 첫 번째 소설집인 <영혼을 팔기에 좋은 날>에 관심이 가게 됩니다. 이 소설집에는 책의 제목이기도 한 ‘영혼을 팔기에 좋은 날’과 ‘천사의 가루’를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은 신기루 같은 주인공들이 펼치는 기억과 그리움, 사랑과 집착, 욕망과 두려움에 관한 이야기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세련된 구성과 감각적인 언어들이 기억과 환상의 세계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판타지적 요소를 차용하고 있지만, 곽세라 작가만의 독특한 사유는 삶의 본질을 부드럽게 꿰뚫고, 심오한 생의 물음들에 관한 품격 있는 관조를 보여준다.”고 적은 출판사의 리뷰에서처럼 등장인물에 대한 설명이 생략되어 있어 베일에 싸인 분위기이며 감각적인 글흐름은 젊은이들에게 강한 끌림을 줄 것 같습니다.
<영혼을 팔기에 좋은 날>의 여주인공 유정은 어머니가 하는 미장원 단골인 미나선생의 권유에 따라서 그녀의 극단 츠키(‘달’이란 뜻의 일본어)에서 연습생으로 시작하는데, 허드렛일도 하면서 연극연습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극단 츠키는 동경과 서울에 연습실을 가지고 있으며 공연도 하기 때문에 단원들도 서울과 동경을 오가며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극단 츠키에는 뮤토라고 부르는 특별한 연기자가 미나선생이 주선하는 공연을 하고 있다는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뮤토’는 ‘변화하는 자’라는 뜻의 라틴어인데 뮤토가 하는 플레이는 공연을 의뢰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역할극이지만 미나선생이 극본을 통하여 지시하는 내용의 범위 안에서 연기해야 한다는 금기가 있습니다.
유정이 뮤토로 연기하면서 극본의 범위를 벗어났던 사례에서 의뢰자가 자살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뮤토의 역할에 대한 궁금증을 풀 수 있습니다. 의뢰인은 대부분 심리적 결핍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인데, 뮤토는 그들이 갈망하는 결핍을 채워주면 의외의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완전한 사람은 플레이를 원하지 않아. 누군가를 사랑할 필요도 없지, 심장 끝을 태우는 갈망, 가질 수 없는 마지막 조각이 이 게임을 계속하게 하는 거야. 몸부림치고 비명을 지르면서도 결국 마지막 장면까지 살아있게 하는 거라구.(163쪽)”라고 정리하는 미나선생의 설명이 알 듯 모를 듯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뢰인이 요구하는 플레이는 철저하게 자신을 제어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마치 영혼이 소진되는 느낌이 남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나선생이 뮤토에게 플레이가 있다는 사인을 줄때 “영혼을 팔기에 좋은 날이지?”
이 이야기는 간이역이 있는 일본의 어느 한적한 바닷가 오오가케무라에 숨어든 유정이 뮤토로 활동한 자신의 짧은 인생의 흔적을 되돌아보면서 뮤토의 역할에 대한 회의를 정리하는 과정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과거에서 현재로 자유롭게 넘나드는 작가의 상상력을 뒤따라가는 것이 숨차기도 합니다. 게다가 오오카게무라 마을에 정식으로 등록되지 않은 길고양이 같은 존재로 살아가는 또 다른 쌍의 삶과 엮어 들면서 더욱 조심스럽게 줄거리를 따라가야 합니다.
두 번째 소설 ‘천사의 가루’는 비행기로 도착하는 연인을 만나기 위하여 공항으로 나가던 남자가 자동차사고로 숨지면서 남아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스케치입니다. 특히 만나야 하는 사람이 사라진 빈 자리에 남은 상실감과 그 여자를 바라보는 또 다른 남자의 애닯은 사랑을 지금까지는 볼 수 없었던 언어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매일 공항에 나가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여자에게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가 전한 것은 작은 자기함에 담긴 ‘천사의 가루’였습니다. 이 가루를 불어내면 죽은 자가 모습을 드러내는 환상에 빠져들게 된다는 독특한 설정인데, 결국은 마법의 가루가 담긴 자기함이 비어가면서 남자의 죽음은 현실이 되는 것일까요?
곽세라작가가 펼치는 독특한 삶의 세계는 아마도 전 세계를 내 집처럼 드나들며 인연 닿는 대로 만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얻은 영감을 녹여 창조한 것이라고 보입니다. 뮤토가 펼치는 플레이에서 힐링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엿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