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와인에 담긴 과학 - 와인에 얽힌 15가지 과학 이야기
강호정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2년 1월
평점 :
제 경우를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주종을 가리지 않는 편입니다. 그렇지만 나름대로는 술이 주는 느낌으로부터 술을 마시는 분위기까지를 제대로 느끼려 생각하는 편입니다. 최근에는 제가 알라딘 블로그 커뮤니티에서 닉네임으로 사용하고 있는 브랜드의 소주를 주로 마시는 편입니다. 하지만 지방 출장이라도 가게 되면 지역별로 나뉘어있는 브랜드 소주 혹은 토속주를 선택하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다른 동네에 가면 그 동네 술을 마셔 보아야 한다.’는 강호정교수님의 와인선택철학을 저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양조(釀造)가 정부의 통제 아래에 있기는 하지만 고장마다 독특한 향미를 자랑하는 향토주가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일제강점기에 우리문화를 말살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대부분의 향토주가 사라지고 근래 들어 각고의 복원작업 끝에 몇 가지 술이 다시 옛 맛을 살리고 있습니다. 다른 동네에 가면 그 동네 술을 마셔 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와인에 관한 이야기가 곁길로 빠졌습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부상하고 있는 와인에 저 역시 관심을 가져보려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만, ‘와인’에 대하여 알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와인을 마실 기회가 되면, 약주마시 듯 원샷을 하지 않는 선에서 와인에 대한 무식이 탄로 나지 않도록 위장하고 있다는 고백을 드립니다. 이제 겨우 까베르네 쇼비뇽이 와인을 만드는 포도의 품종이라는 것을 깨친 저로서는 “와인의 ‘폭발적’ 맛이 화산폭발로 생긴 토양의 맛을 반영한다.”거나 “붉은 토양이 와인의 ‘붉은’ 고유의 색을 만들어낸다.”는 등 저자가 인용한 현학적이고 수사적인 표현을 따라할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강호정교수님께서는 와인에 대한 많은 과학적 연구성과 가운데 일반인들이 흥미를 가질만한 것들을 골라 이해하기 쉽도록 정리하여 <와인에 담긴 과학>에 담았다고 합니다. 와인양조학(oenology) 수준의 학문적 성과까지 다룬 것은 아니지만, 일반인도 잘 알고 있는 네이처나 사이언스와 같은 과학전문 학술지에 실린 내용들이니 일반적으로 와인을 소개하는 글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내용들이라 하겠습니다.
서문을 읽다보면 글쓰기와 책쓰기에 대한 강호정교수님의 내공에 감탄하게 되는 대목이 있습니다. ‘포도는 뿌리, 줄기, 잎, 열매의 네 가지 요소로, 자연은 흙, 물, 공기, 불의 네 가지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고 있는 도멘 르루와를 소유하고 있는 랄루 비즈-르루와의 생각을 인용하면서, 과학자답게 ‘지상은 흙, 물, 공기, 불의 네 가지 기본요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우주는 에테르라고 하는 완전한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5원소설’을 끌어와 기본틀을 구성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천문학의 영역에 속하는 별자리 12궁이 흙, 물, 공기, 불의 네 가지 구성요소가 각각 3개씩 배치되어 구성된 것을 참고하여 5원소에 각각 세 가지의 세부항을 두어 모두 15가지의 이야기를 담았다고 하니, 정말 깜찍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흙, 물, 공기, 불, 에테르’에 각각 들어가 있는 세 꼭지의 글들이 5원소의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의학은 과학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고 단정적으로 말씀하는 실험실과학자도 있습니다만, 방법론적으로 볼 때 의학은 분명 과학의 카테고리에 속하는 응용과학이라고 분류해야 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책읽은 느낌을 적어보겠습니다. 먼저 ‘착한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라는 제목을 붙인 제 1 장을 보겠습니다. ‘와인에 얽힌 다양한 생물의 세계’라는 부제가 달린 것처럼 주로 와인의 품질을 좌우하는 미생물에 관한 학문적 분석을 담고 있습니다. 포도를 발효시켜 와인이 되는 과정(이런 역할을 하는 미생물은 좋은 놈입니다), 그리고 와인을 산패시키는 주범(당연히 나쁜 놈이겠지요?) 그리고 아이스와인과 유사한 소테른이나 토카이 같은 고급 후식와인은 포도를 부패시키는 미생물의 특성이 기후조건에 따라서 유익한 방향으로 전환되는 점을 이용하여 만들었다고 해서 이상한 미생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홍승우화백의 삽화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7080세대에게는 익숙한 석양의 무법자의 한 장면을 패러디한 삽화를 보면 저자의 생각을 참 잘도 읽었구나 싶습니다.
저의 리뷰를 읽으시는 분들이 대부분 보건의료분야에 계시기 때문에 ‘와인이 보약이다’라는 제목의 5장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레드 와인에는 폴리페놀이 많이 들어 있어 건강에 유익하다고 믿어져 왔지만, ‘프랑스인의 역설’이 그 믿음에 힘을 더해주었다고 합니다. 프랑스인들은 다른 서구사람들보다 엄청난 양의 포화지방을 섭취하는데, 포화지방은 녹는점이 높기 때문에 많이 섭취하면 혈액을 탁하게 하고 혈관이 막히기 쉽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건강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포화지방을 많이 섭취하는 프랑스사람들에서 심혈관질환의 발생이 적은 비밀이 바로 레드와인에 숨어있다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구전되어오던 이 생각은 1990년대 프랑스 과학자 세르주 드노박사가 학계에 공식 보고하여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강호정교수는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는 점도 빠트리지 않아 <와인에 담긴 과학>에 대한 신뢰를 높이고 있습니다. 마침 책을 읽고 리뷰를 준비하는 동안 레드와인이 심혈관질환 건강과 노화에 이롭다는 연구결과 가운데 연관된 데이터를 대규모로 조작한 논문들이 있었다는 충격적인 보도가 있었다는 점을 알려드립니다.
<와인에 담긴 과학>을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와인의 떼루아에 대한 과학적 접근방법을 쉽게 설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와인에 문외한이지만 ‘떼루아’의 의미를 알게 된 것은 제가 드라마에 관심이 많은 덕분인데 2년 전에 방영된 동명의 드라마에서 배웠기 때문입니다. 위키디피아에는 “<떼루아; Terroir>가 원래 토양을 의미하는 프랑스 단어이지만 포도주(Grape Wine)가 만들어지는 모든 환경. 즉, 포도가 자라는 토양과 기후조건, 자연조건 그리고 만드는 사람의 정성 등을 뜻하는 의미로 해석된다.” 되어 있습니다. 강호정교수님께서 떼루아를 ‘와인의 생태학’ 혹은 ‘포도밭의 정체성’이라한 표현한 까닭이 이해되는 대목입니다.
강호정교수님께서 <와인에 담긴 과학>에서 와인과 관련된 ‘흙, 물, 공기, 불, 에테르’ 등 다양한 영역에서의 과학적 분석결과를 쉽게 설명하고 있어 독자들에게 와인에 대한 색다른 앎을 얻을 기회가 될 것입니다. 조금 더 소개드린다면 유전자분석방법을 통하여 포도품종의 족보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거나, 현장을 찾지 않더라도 원격탐사와 인공위성사진과 같은 지리정보시스템을 이용하여 포도품종에 꼭 맞는 재배장소를 찾아낼 수 있게 되었다거나, 화학분석을 통하여 가짜 와인을 감별할 수 있게 되었다는 등의 이야기들도 읽을 수 있습니다.
책을 읽고서, 어쩌면 뚱딴지같은 생각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와인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려는 시도가 ‘신의 영역을 넘겨보는 인간의 무한도전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의 물방울’이라 부르는 와인을 인간의 영역으로 끌어내려 과학이라는 포장으로 찢고 쪼개고 부수는 참담한 짓을 신께서 관용하시겠는가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는 과학적 분석으로도 소믈리에의 평가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는 합니다만, 체스게임에서 드디어 컴퓨터가 인간을 이길 수 있었다는 예를 보더라도 언젠가는 한 장의 분석평가서로 와인의 질을 표시하는 날이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되면 ‘신의 물방울’이라는 별명도 사라지게 되는 것인가요?
-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을 읽고 작성된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