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익은 세상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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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들어 한파가 몰려오고, 원자력발전소가 가동을 멈추면서 블랙아웃이라나 전력수급에 비상이 예고되고 있는 가운데 송년을 맞은 도시의 밤은 울긋불긋 현란하기만 합니다. 금년에는 보릿고개를 어떻게 넘기느냐고 걱정하던 소리가 사라진 것이 불과 얼마되지 않은 듯한데, 기억력의 한계란 참 오묘한 것 같습니다. 기억을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빨리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기도 합니다.

 

황석영작가님의 신작 <낯익은 세상>은 우리의 기억의 편리함을 꼬집는 듯합니다. 작가께서 말미에 이야기의 무대가 되고 있는 꽃섬이 난지도임을 에둘러 말씀하시고 있습니다만, 난지도가 충남 당진에 수욕장이 있는 섬인줄 아는 젊은이들이 더 많을 수도 있는 세상입니다.

 

난지도는 지금의 월드컵경기장 근처 한강에 있던 섬이었는데 1977년 제방을 쌓아 연결된 다음 1993까지 서울시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매립하여 그 높이가 90m나 되었는데, 쓰레기 매립이 중단된 다음 시민공원으로 조성되어 지금의 하늘공원과 노을공원으로 변신하였습니다. 아직도 가스를 포집하는 시설을 작동하고 있지만 숲이 그럴듯하게 우거지고 뱀이 서식할 정도가 되었으니 당시 난지도에서 생활하시던 분들이 보면 상전벽해가 따로 없다할 것입니다. 난지도에 화재가 발생했던 시기를 고려한다면 시계바늘을 대충 30년 쯤 되돌려야 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주인공 딱부리와 어머니는 도시의 달동네에서도 밀려나 꽃섬으로 흘러드는데 소년티를 갓 벗은 딱부리의 눈을 통해서 난지도의 삶이 어땠는지 가늠은 해볼 수도 있겠습니까만 그들의 절절한 삶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보면 제가 난지도를 찾았던 것이 1981년 가을쯤인가 그랬으니 30년 전이 되는 것 같습니다. <낯익은 세상>에서 나오는 꽃섬의 이야기가 펼쳐지던 무렵이 아닐까 싶습니다. 근무하던 병원의 원목신부님과 함께 주민진료에 나섰던 것인데 그분들이 살던 곳을 둘러볼 기회도 있었습니다. 작가님께서 그리는 것처럼 파리가 들끓고 피곤한 몸을 눕히기조차 어려운 그런 곳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황석영작가님이 그리는 꽃섬은 도시에서 나오는 쓰레기더미에서 재활용이 가능한 물건들을 수집해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하지만 작가님은 딱부리를 중심으로 한 소년들의 세계, 그리고 딱부리와 땜통의 눈을 통해서 꽃섬의 옛날을 다시 불러내는 것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옛날이야기를 잊지않기를 바라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황석영작가님이 들려주시는 꽃섬의 옛날이야기는 모처럼 찾아온 큰고모님이 들려주시던 옛날이야기처럼 술술 읽혀질 뿐 아니라 장면들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합니다. 아무래도 우리가 살았던 그 때의 이야기, 즉 제목처럼 낯익슨 세상이라서 그런가 봅니다.

 

땜통의 때묻지 않은 심성이 매개하여 등장하는 김서방네 작은 아이가 인도하는 그 옛날의 꽃섬은 “무성한 억새의 마른 잎들이 얼굴에 스치더니 갑자기 캄캄해졌다가 부옇게 밝아왔는데, (…) 주위는 대낮처럼 밝거나 또렷하지는 않고 마치 달밤처럼 은은했다. 오른쪽으로 강이 흐르고 있었고 건너편 들판 머리에는 병풍 같은 산들이 오르내리며 빙 둘러져 있었다. 뒤로는 높다란 언덕이 강물 가까이 늠름하게 절벽처럼 솟았는데, 앞으로는 모래밭 포구와 얕은 야산들이 보이고 들판에는 수수가 한들거리고 있었다.(135쪽)”는 것입니다. 그 옛날 우리네 시골 어디서라도 볼 수 있었던 풍경이기도 합니다. 아니 지금도 도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만날 수 있는 친근한 우리산하의 표정이기도합니다.

 

지금은 도시의 밝은 불빛에 멀리 쫓겨가 눈에 띄지 않는다고들 합니다. 동네마실 가셨던 할아버님께서 한잔하시고 돌아오시다 마주친 도깨비들과 씨름을 하셨다는 고모님 이야기에 등장하는 허깨비들은 친근한 이웃이기도 했습니다. “우리 동네는 언제나 너희 곁에 함께 있는 곳이다. 너희들이 있어야 우리가 있게 되고 너희들이 없어지면 우리도 없어지는 거야.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오리 한 마리, 산과 강에 이르기까지 함께 살고 너와 똑같단다.(207쪽)”라는 김서방네 할아버지 말씀처럼 옛날 사람들이 있어 지금 우리가 있는 것이지만, 또 우리가 있어 기억해야 옛날 사람들이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겠지요. “망할 것들아 여기 니들만 사는 둘 알아? 니덜 사람새끼 다 없어져도 세상은 그대루야(218쪽)”는 버드낭구할미의 경고를 새기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어쩌면 김서방네 가족같은 존재가 있어 해마다 농사를 지어 갈무리해둔 풀꽃의 씨앗들을 이듬해 다시 뿌리기 때문에 쓰레기로 뒤덮여 죽음의 땅처럼 되었던 난지도가 지금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제 다녀온 월드컵공원에서는 그 옛날 쓰레기섬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이유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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