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 & 니체 : 철학자가 눈물을 흘릴 때 지식인마을 37
김선희 지음 / 김영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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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학의 뿌리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철학의 뿌리와 이어지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영국의 지성 AC 그레일링은 “‘철학’은 말 그래도 ‘지혜에 대한 사랑’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지만, ‘탐구’나 ‘탐구와 반성’이라고 정의하고 이러한 표현의 범위를 최대로 넓혀 세계와 그 안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것을 이해하려는 노력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써야 더 좋고 정확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철학한다는 것이 바로 사유를 통하여 물음을 던지는 일이자 던져진 물음에 답을 구하는 일’이며 철학적 탐구의 목적은 지식과 진리, 현실, 이성, 의미, 가치에 대한 통찰을 얻는데 있다고 합니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그리고 인문학의 주제와 방법이 뚜렷하고 구분되기 전에는 철학이 거의 모든 교양인이 갖춰야 할 기본적인 덕목이었으며, 요즈음과 같은 실험적 방법론이 구체적으로 확립되지 않은 탓에 인간의 이성과 관찰만으로도 충분히 질문과 답변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노병사는 당연히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며, 그리스 시대의 의사들은 자신이 진료하고 있는 환자들을 관찰하여 얻게 되는 질병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질병이 생기는 원인이 무엇인가 질문을 던졌고, 사유를 통하여 해답과 치료법을 구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서양의학에서 해부학이 발전하면서 임상증상에 따라서 해부소견에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고, 이러한 관찰은 자연스럽게 임상증상에 따라 질병을 분류하고 해부소견과 연관을 맺으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는데, 이러한 흐름 자체가 사유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사유의 방법론이 발전하면서 서양철학은 17세기에 자연과학을, 18세기에는 심리학을, 그리고 19세기에는 사회학과 언어학을 낳았으며 20세기 인지과학이 발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철학의 특성인 ‘질문하고 답을 구하는 탐구활동’이 결실을 맺어 올바로 질문하고 올바로 대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을 때 이러한 탐구는 철학으로부터 독립하여 한 분야의 학문으로 독자적인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미분화되어 빠르게 성장해온 각 분야의 학문이 최근에는 그동안의 성과를 서로 공유하여 시너지를 내거나 한계에 부딪힌 문제해결방식을 찾아내는 등, 학문발전에 있어 통섭이라는 국면의 대전환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그리고 인문학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학문에 있어 일종의 적분화가 일어나고 있다하겠습니다.

의학의 특성 상 이런 움직임이 가장 빠르게 나타나는 분야라 하겠습니다. 질병과 관련한 사회현상을 추구하기 위하여 사회과학적 방법을 차용하고 그 결과를 해석함에 있어서도 사회과학적 시각이 꼭 필요하다 이야기입니다. 또한 최근 대두되고 있는 다양한 생명윤리에 관한 이슈를 정리하기 위하여 체계화되고 있는 생명윤리학이 “의학기술이 계속발전하면서 생명윤리학의 주제가 철학과 의학, 법학, 사회학, 공공정책, 교육 및 관련 분야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에게 갈수록 현실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AC 그레일링 지음, ‘새 인문학 사전’).

이러한 사조는 우울증과 같이 마음에 원인을 둔 질병의 본질을 추구하는 마음의 철학, 인간의 사고체계를 추구하는 신경철학 등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시 철학적 상담을 통하여 현대인의 마음에 생긴 병을 치료하고자 하는 철학상담치료로 발전시키려는 시도로 이어지고 있는데 그 씨앗을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철학적 사유에서 찾고 있는 노력을 김선희교수님의 <철학자가 눈물을 흘릴 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강원대학교에서 철학을 강의하시는 김교수님께서 우리의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이 매일 울고 있으면서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살다가 어느 날 통곡하고 있는 자신을 보고 당혹스러워 한다는 것을 깨닫고 치료학문으로서의 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현대인의 보이지 않는 눈물은 삶이라는 수레바퀴에 끼어 살아가는 고통에 기인하는 것으로, 철학을 통하여 삶에 따르는 고통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게 되었는데, 최근에 ‘한국철학상담치료학회’를 창립하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김교수님이 독일철학에서 해답을 얻고자 한 것은 의학철학에 대하여 많은 연구성과를 쌓아왔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염세주의자로 인식하고 있는 쇼펜하우어와 허무주의자로 알고 있는 니체를 들어 현대인의 눈물을 치료하는 바탕을 세우려는 시도가 옳은 선택일까 싶었습니다. 특히 냉철한 마음으로 현상을 직관하고 사유를 통하여 문제의 답을 추구하는 철학자가 눈물을 흘린다는 상황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저자는 먼저 쇼펜하우어의 삶을 조명하여 그의 철학적 바탕에 깔려 있는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을 깨닫게 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방문한 툴롱의 병기창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노역하고 있는 6천명의 노예의 비참한 모습이 그의 생애를 통하여 인간의 고통에 대하여 천착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와의 약속 때문에 뒤늦게 시작한 철학공부를 통하여 쇼펜하우어는 고통에 대한 물음을 통하여 ‘고통의 해석학’을 고통의 치료에 대한 사유를 통하여 ‘치료의 해석학’으로 정리되었는데, 인간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은 쇼펜하우어는 사상의 중심개념으로 자리하고 있는 동고(同苦; Mitleid)에 담겨 있다고 하겠습니다.

“동고는 고통을 함께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함께할 대상으로서의 고통은 자신의 고통이 아니라 타자의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동고란 자신과 타인을 구분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고통에 함께하는 것을 뜻한다고 해석”되는 것입니다.(51쪽). 쇼펜하우어가 고통치료의 도구로 인식한 것들로는 예술과 정관에 의한 이념의 인식이었지만, 이 방법들이 고통치료에 순간적인 도움밖에 주지 못한다는 한계를 깨닫게 되었고, 궁극적으로 금욕 혹은 고행이라고 번역되는 아스케시스(Askesis)가 답이 된다고 보았습니다. 고통을 해소하는 방안을 찾기보다는 금욕 혹은 고행을 통하여 고통 자체를 느끼고 이를 뛰어넘는 해탈의 지경에 이르는 것이야 말로 바른 길이라는 것입니다. “고통에 의한 고통의 정화를 통하여 평온과 열락과 숭고에 안주한다. 결국 이와 같은 고통에 의한 고통 극복이라는 도식을 우리는 삶을 살아감으러써 삶을 완성한다는 도식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112쪽)”

쇼펜하우어를 이은 니체는 최초의 심리학자라고 불리는 것처럼 심리학이 철학으로부터 독립하여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매김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는데, 그는 예술과 철학이 우리의 삶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예술이나 철학이 추상적이고 우연한, 사소한 사건이 아니라 삶에 치명적인 독이 될 수도 있고 약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따라서 예술이나 철학은 우리가 가볍게 스치고 지나갈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꼼꼼히 그것의 정체를 살펴보아야 할 대상이다.(128쪽)”

그는 삶이 치유를 필요로 할 때, 이에 상응하는 예술과 철학이 펼치는 처방전에서 답을 구하게 되었는데, 치유의 대상을 두 종류의 고통받는 자로 보았습니다. 즉, 삶의 충일로 고통받는 자와 삶의 빈곤으로 고통받는 자입니다. 니이체는 삶의 빈곤으로 고통받는 자들이 원하는 예술과 철학은 도취와 경련과 마비를 가져오는 것들이며 이런 류의 예술과 철학의 전범이 바그너와 쇼펜하우어라고 비판하면서 진정한 예술과 철학은 삶의 충일이 창조되는 것으로 건강한 자의 예술이고 건강한 삶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같은 사안을 두고 쇼펜하우어는 치료적 시각으로 예술과 철학의 역할을 보았고 니이체는 예방의 시각에서 예술과 철학을 본 것이 아닐까요?

한국철학상담치료학회에서 사용하는 철학 프락시스는 인간의 삶에 대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하여 철학이 기여할 수 있는 무엇을 찾기 위한 구체적 실천방안을 찾는 것이라고 한다면 임상철학이라는 개념을 적용하는데 있어, 지금까지 환자를 대상으로 해왔던 의학에 질병을 사전에 예방하는 영역으로까지 개념을 넓히고 있는 의학과 연계하는 것이 목표를 보다 구체화하고 쉽게 도달하도록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분야에 대한 의료인들의 관심을 촉구하는 이유는 의학이 도달하고 있는 곳에 타 학문이 이르는 것보다는 의학에서 타학문을 쫓는 것이 더 쉬울 수도 있겠다싶어서입니다.

끝으로 눈물을 흘리는 철학자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철학자가 눈물을 흘릴 때>라는 제목이 혹시 스탠퍼드대학교 정신과의 어빈 얄롬교수의 <니체가 눈물을 흘릴 때>의 영향을 받은 것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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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2011-12-05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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