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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경성은 명랑하라 - 식민지 조선을 파고든 근대적 감정의 탄생
소래섭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식민지 조선을 파고든 근대적 감정의 탄생’이라는 부제를 단 <볼온한 경성은 명랑하라>는 우리 사회에 슬그머니 스며든 ‘명랑(明朗)’이란 감정의 정체를 뒤쫓은 울산대학교 소래섭교수의 문화사적 탐정놀이라고 읽었습니다.
프롤로그를 통하여 저자가 <명랑운동회>라는 TV오락프로그램을 인용하고 있어 꽤나 친근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제가 명랑운동회를 즐겨보던 시절의 나이와 비교해보면 조숙했을지도 모를 나이에 즐겨보았던 모양입니다. 어떻거나 저 역시 ‘명랑’하면 <명랑운동회>가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후배의 학위논문의 초고를 읽다가 뭔가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명랑’의 정체를 뒤쫓기 시작했다는 저자의 설명을 듣고 보니 근래 들어 ‘명랑’이란 화두를 들어본 기억이 가물거립니다. 제1장에서는 ‘명랑’이 우리의 뇌리에 기억되기까지의 역사를 뒤쫓고 있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명랑’은 백성의 눈을 가려 현혹하려는 통치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근래 마지막으로 사용되었던 것이 제5공화국이었고, 그 앞에 자주 인용되었던 것이 제3공화국, 그리고 거슬러 결국은 일제 강점기에 식민통치의 문화적 접근방안으로 강요된 것이 처음이라는 근원에 도달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결국은 억압된 사회에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명랑’한 사회를 만들려는 노력이 경주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사회에 특정정서가 자리를 잡는데 힘으로만 눌러서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일제강점기를 되돌아보면 민족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더 나아가 경제적 측면에서도 조선의 백성들은 우울한 분위기일 수밖에 없었음에도 일제가 던져준 ‘명랑’이란 화두가 그런대로 먹혀들어갔었던 모양입니다.
우리 사회에 명랑이란 말이 자리 잡게 되는 과정에 세 가지 요인이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저자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첫 번째 요인은 처음 시발점이 되었던 조선총독부의 ‘감성정치’, 두 번째 요인인 일제강점기에 시작된 자본주의적 근대화과정의 요소로서의 ‘감정관리’ 그리고 세 번째 요인은 김기림이 간파한 ‘배후의 감정’이라는 것입니다.
각각의 요소에 대하여 간단하게 설명을 해보면, 조선총독부가 통치수단으로서 명랑을 강요한 것은 식민지화에 대한 조선백성들의 열패감, 경제적 수탈 및 부를 창출한 수단을 빼앗긴 절망감 등으로 바닥까지 가라앉은 조선백성들의 감정곡선을 끌어올려 일제가 예정하고 있는 전쟁수행의 장애요인을 사전에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농업을 비롯한 일차 산업중심 경제구조를 가진 조선사회가 유통에 중점을 둔 상업중심의 자본주의적 경제구조로 전환되면서 감정서비스의 필요성이 눈을 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김기림을 인용한 ‘배후의 감정’이란 ‘명랑’이란 가면 뒤에 숨어 있는 본디의 의도를 깨부수기 위한 배후의 감정으로서 ‘명랑’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식인들이 간파해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소래섭교수를 따라서 ‘명랑’에 숨어 있는 이러한 의미들을 뒤쫓다보니 상당기간이 일제 강점기간에 조선사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사회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화두가 되는 위생문제에 관해서도 정말 경성거리가 인분이 나뒹구는 끔찍한 상황이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지금은 보기 힘든 광경이겠습니다만, 예전에는 시골에서 밭농사를 짓는데 인분이 정말 귀하게 쓰였기 때문에 뒷간에서 일을 보아야 했고, 화장실을 정기적으로 치우기 위해서 똥장군에 퍼 담아 소달구지에 얹은 똥통으로 져 나르던 인부들을 흔히 보고 자란 세대이기도 합니다. 당시 젊은이들의 일상, 대중문화, 돈벌이, 연애와 스포츠 등등 다양한 화제를 중심으로 하여 식민지 조선사회가 무엇을 고민하고 있었는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명랑을 뒤쫓는 소래섭교수의 탐정놀이의 결말은 ‘만들어진 명랑’이란 제목으로 제3부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조선사회가 피동적으로 수용하게 된 ‘명랑’이란 화두를 능동적으로 전환하는 과정에 대한 설명입니다. 앞서 소래섭교수가 세 번째 요인으로 김기림을 인용하여 설명한 배후의 감정으로서 명랑은 그야말로 주체적으로 명랑을 추구하게 되는 과정인데, 이는 오히려 웃음보다는 눈물에 가까운 역설적인 접근방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즈음 젊은 세대들은 이제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고통이 크고 슬픔이 깊을수록 웃음에 대한 욕망이 더 세차게 끓어오른다. 이주일과 배삼룡이 아직도 한국인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그들이 암울했던 시대를 대표하는 코미디언이기 때문이다.(219쪽)”는 소래섭교수님의 말은 그의 속마음에 어디에 있는지 엿볼 수 있는 단초라 생각합니다.
소래섭교수님은 ‘명랑’이란 화두를 쫓아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당시의 조선사회는 일하고자 하나 일자리가 없는 절망한 젊은 청춘들이 넘쳐나는 시기였고, 그들의 관심을 ‘명랑’이란 밝은 이미지의 단어로 포장해서 하릴없이 거리를 쏘다니게 만들다가 결국은 총 한자루 쥐어서 전선으로 내몰려는 일제의 간악한 흉계가 감추어져 있었다는 것을 찾아낸 것입니다.
하지만 소래섭교수님의 탐정놀이의 마지막 반전은 바로 ‘88만원 세대’라고 자조하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메시지를 담아내려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이제는 듣기조차 어려운 ‘명랑’이란 단어이지만, 사실은 ‘행복’전도사, ‘쿨’하다, 등 다른 이름으로 가면으로 바꿔쓰고 우리에게 던져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소래섭교수님은 이 책의 에필로그에서 “공허한 행복론 따위에 매달리거나 허벅지를 바늘로 찔러가며 쿨한 척하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손바닥만 한 거울과 그 거울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만 있으면 명랑해질 준비는 다 마친 것이나 다름없다. 진정한 명랑은 언제나 감정의 노예가 아니라 감정의 주인이 되려는 자에게만 찾아온다.(281쪽)”는 결론으로 일제강점기의 조선 지식인들이 감지했던 ‘배후의 감정’을 다시 깨달아야 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생각합니다.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파워북로거 지원 사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