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필리아 - 우리 유전자에는 생명 사랑의 본능이 새겨져 있다 자연과 인간 15
에드워드 윌슨 지음, 안소연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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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위대한 생물학자이면서 생물학이 지향할 새로운 목표를 끊임없이 제시해온 에드워드 윌슨교수님을 <통섭; http://blog.joinsmsn.com/yang412/4895225, http://blog.yes24.com/document/4851897>을 통하여 처음 만났습니다. 학문이 발전하면서 세분화가 가속화되면서 이젠 학자들도 자신이 전공하는 분야의 테두리를 조금만 벗어나도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지적하고, 세분화된 학문이 이룩한 성과들이 서로 조화를 이룬다면 시너지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학문의 벽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음을 그러한 경향을 통섭(統攝, consilience)이라는 새로운 용어로 풀어내고 있었습니다. 558쪽이라는 두께가 큰 부담이었지만, 지금까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던 것을 퉁겨내는 윌슨교수님의 예리한 분석과 예시에 빠져들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섭>은 두께만큼이나 딱딱한 내용이었다는 느낌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바이오필리아>를 통하여 윌슨교수님이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역시 ‘통섭’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통섭>이 학문의 영역을 교집합으로 가져가서 얻을 수 있는 효과를 학술적 접근으로 설명하고 있다면 <바이오필리아>는 생물학 연구의 현장으로부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서 자연과학에 사회과학 그리고 인문학, 종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을 접목시켜 이야기를 완성해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바이오필리아>를 말랑말랑하게 풀어서 쓴 <통섭>이라고 본 것입니다.

뉴기니에서 흰색장식풍조를 만난 이야기로부터 자연과학자들이 사물에 접근해가는 경로를 요약해보겠습니다. 과학은 자연을 훼손하고, 과학에는 예술적 감수성이 없으며, 과학자들은 잉카시대의 황금을 녹인 정복자들과 다를 바 없다는 인문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하여 “과학은 분석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종합적이기도 하다. 종합단계에서 과학은 예술 같은 직관과 비유적인 묘사를 이용한다. 초기 분석 단계에서는 각 행동을 유전자와 신경 감각 세포수준으로 분석할 것이나, (…) 종합단계에서는 이 생물단위의 가장 기본적인 행동조차 복잡하고 난해한 사회 생물학적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90쪽)”고 자연과학자를 위한 변명(?)을 내놓고 있습니다. 윌슨 교수님은 “과학 문화의 최종 목표와 척도는 새로운 사실의 발견이다. (…) 과학자는 알기 위해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기 위해 안다. (…) 인문학자들은 지식인 부족의 무당으로서 지식을 해석하고 민속학, 의식, 경전을 전달하는 현인이다.(95쪽)”라고 설파하여 과학자와 인문학자가 맡은 역할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수리남의 베른하르츠도르프의 숲에 사는 개미의 생태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앞서 인용한 흰색장식풍조에 대한 이야기를 거쳐 젊은 시절 뱀을 관심을 두었던 뱀에 대한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생물학 분야의 연구로부터 생물사회학적 해석을 거쳐 신화를 비롯한 인문학적 자료를 이끌어 마지막으로는 인간의 본성에는 자연과 다른 생명체에 대한 사랑이 내재되어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환경 보전이라는 거대한 담론으로까지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통섭>에서 처럼 윌슨교수는 이번에도 Biophilia라는 새로운 단어를 내놓고 있습니다. 최재천교수님이 추천사를 통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바이오필리아는 ‘생명’이라고 번역한 Bio-와 좋아함 혹은 호성(好性)이라고 번역하는 philia를 조합한 단어입니다. 번역자는 Biophilia를 ‘생명사랑’이라 번역했으니 좋은 번역어라 생각합니다. 윌슨교수님이 ‘인간의 생명사랑을 조정하는 유전자가 염색체17번에 있다.’고 주장하셨다는 글을 읽고 ‘정말?’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윌슨교수님은 다른 생물과 친밀하게 지내려는 인간의 욕구는 상당히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를 뒷받침할 과학적 근거가 충분하지는 못한 형편이므로 앞으로 탐구가 필요할 것이라고 합니다.

저자가 주장하는 생명사랑은 궁극적으로는 인류에 의하여 저질러지고 있는 자연파괴의 중단과 생물다양성의 보존이라는 목표를 두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세계인구의 폭발적 증가에 따라 자연상태로 보존되고 있는 지역이 급속하게 감소하고 있고, 이에 따라 멸종을 맞는 생물종의 숫자가 빠르게 늘고 있는 현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천연의 공간을 얼마의 크기로 남겨야 하는지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 생각합니다.

윌슨교수님이 인용한 인도네시아의 크라카토아섬 사례를 생각해봅니다(114쪽). 크라카토아섬은 1883년 8월 27일 화산폭발로 생명체가 몰살하였는데, 1년 뒤에 첫 번째 식물이 돋아났으며, 1920년에는 울창한 숲으로 뒤덮이고 많은 동물 종이 섬으로 이주했다는 것입니다. 즉 원상을 회복하는데 40년이 채 걸리지 않은 것입니다. 이 사례를 매머드가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한 유성충돌사건으로 연결해서 다시 생각해보면 유성충돌로 매머드만 사라졌겠느냐는 추론이 쉽게 성립될 수 있습니다. 엄청난 숫자의 생명체가 멸종을 맞게 되었을 것입니다. 크라카토아 섬의 경우는 화산의 피해를 입지 않은 인근지역에 살고 있는 생명체가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유입됨으로써 원상에 가깝게 회복이 가능했을 터이나 유성충돌과 같은 지구적 사건의 경우에는 피해를 입지 않은 곳이 과연 얼마나 되었을 것인가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지구 생태계가 남아있게 된 것입니다. 또한 지구에서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는 근본적으로 살아남기 위하여 경쟁하는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멸종을 맞게 되는 생명체도 있다고 본다면, 인류가 환경의 보존과 생물다양성의 유지에 관심을 가지고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면 지구 생태계의 파국적 종말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긍정적인 생각도 해봅니다.

인간의 본능에 담긴 다른 생명체에 대한 사랑, 생명사랑(Biophilia)은 인간이 다른 생물보다 훨씬 우위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동물들을 잘 안다는 사실이 생명의 참된 의리를 고양하기 때문에 인간이 고귀할 수 있다는 윌슨교수의 주장은 참으로 가슴에 와 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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