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섬
전상국 지음 / 민음사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우상의 눈물; http://blog.joinsmsn.com/yang412/10365703>을 읽고서이니까 오랜만에 만나는 전상국선생님의 소설집입니다. 소설집에는 중편 ‘남이섬’과 ‘지뢰밭’ 그리고 단편 ‘꾀꼬리편지’, ‘춘심이 발동하여’와 ‘드라마게임’을 담았습니다. 다섯편 가운데 ‘남이섬’, ‘지뢰밭’ 그리고 ‘드라마게임’은 6.25동란의 지워지지 상처를 모티프로 하고 있습니다. 민족의 비극이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어떤 상처를 남겼었는지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배겨내지 못하는 작가의 응어리가 느껴집니다. 전쟁이 끝난 지 반백년이 가까워지는 오랜 세월이 지나고 있으니 전쟁을 기억하는 분들이 많지 않으신 것도 있고, 아무래도 기억에 남기기 싫어 억지로 잊으려하시는 것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아무래도 겪어보지 못한 세대들의 기억에 아픔을 각인시켜 다시는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를 소망하고 계신거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전쟁이라고 해서 서로 죽이는 일만 했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얼마 전에 보았던 영화 <고지전>에서도 다루었습니다만, 막상 부딪혔을 때 살수(殺手)를 펼쳐내기란 그리 쉽지가 않았던 모양이고, 무언가 마음에 걸려 살려주는 경우도 있었던 모양인데, 작가는 <지뢰밭>에서 그런 경우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도 그때의 기억이 단단한 옹이처럼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고 언젠가 풀려날 기회만 기다리며 살아온 셈인데, 그것이 쉽게 풀려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남이섬>의 주제는 전쟁의 와중에서 살아남은 두 사람, 김덕만씨와 이상호씨 만이 기억하는 여자 ‘나미’의 흔적을 뒤쫓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전쟁 당시의 남이섬 분위기를 알았더라면 몇 년 전 가을에 남이섬을 찾았을 적에 그녀의 흔적을 찾아보려고 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전쟁 당시 작은 시골마을 안에서도 이념이 다른(이념이 서로 달랐었을까 싶기도 합니다만,) 사람들이 대립하여 죽고 죽이는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은 겪어보지 못한 일이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김덕만씨와 이상호씨로 대립되는 두 세력을 남한강의 동쪽과 서북쪽으로 나누고 그 강안에 떠있는 섬은 두 세력이 얽히는 묘한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기억하는 여자 나미는 어느 한편의 손만 들어준 것은 아닌 셈이니 두 세력의 대립자체가 과연 이념의 대립이었는지 회의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꾀꼬리편지>에 마음이 많이 가는 것 같습니다. 길이의 여유때문인지 중장편에서는 대체적으로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느슨하게 풀려나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단편은 짧은 길이만큼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잘 압축해내지 못하면 다 읽고나서도 미진한 무엇이 남기 마련입니다. 그런 점에서 <꾀꼬리편지>는 잘 엮여진 이야기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초헌과 우목 그리고 화자(話者) 사이에서 엮이는 묘한 감정을 실타래가 이야기가 마무리될 때까지 한 치 흐트러짐 없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수목의 물오름과 같은 속수무책의 관능으로 온몸이 뜨겁던 나이에 초헌을 만난 화자가 복사골에 정착하게 되면서 뜨겁던 몸을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초헌과 우목으로부터 자연을 배우게 되면서라는 것을 은연중에 전하면서, 우리 또한 자연으로 돌아갈 운명이라는 메시지를 수목장을 통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초헌을 만나 농익은 육신의 갈증을 몰아의 황홀경으로 이끌어갔던 화자로서는 어느 날 갑자기 세상만사가 허망하다는 것을 깨달은 초헌의 변화에 마음의 길을 잃고 말지만, 우목을 만나면서 그 갈증을 자연을 찾아 풀어내게 되지만 두 사람의 현실적인 거리는 결코 가까워진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화자(話者)처럼 저 역시 “상수리나무 잎 하나를 새끼손가락 두 마디쯤의 크기로 정교하게 접어놓은(26쪽)” 꾀꼬리편지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꾀꼬리가 편지를 접다니 참 신기하구나 싶었습니다. 그냥 넘어갈 수 없었던지 작가는 꾀꼬리편지는 거위벌레 암컷이 낳은 알을 잘 건사하기 위해서 만드는 안식처라는 설명에 그 안식처를 만드는 모습까지도 빼놓지 않는 정성을 보여주었습니다. 꾀꼬리는 다만 이를 세상에 알리는 전령사 역할을 하는 셈이라는 것까지도 말입니다.

꾀꼬리편지를 통해서 작가는 “세상의 온갖 예술은 자연을 모방하는 것인데 그것이 자연보다 낫다는 자신이 없으면 아예 손을 대지 말 일.(26쪽)”이라고 우리가 자연을 어떻게 대하여야 할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

우목의 유골을 생전에 소망하던 복사골 백합나무에 뿌리면서 화자(話者)가 얻는 깨달음은... “드디어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으며 늙음과 죽음이 모두 없어졌다는 생각조차 없다는 절간의 말씀처럼 모든 것을 관통하여 하나되기, 그 없음이 바로 죽음이 아니겠는가. 화실이 시위를 벗어나 과녁에 맞는 순간까지가 인생일 터. 화덕을 거쳐 기계공이로 빻은 뼛가루가 이렇게 산 사람의 손가락을 통해 술술 빠져나가 바람으로 물로 사라지는 이 투명한 비움.(37쪽)”

작가의 삶에 대한 깊은 관조의 한 자락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란 생각이 들어 부럽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자연에 스며드는 삶이 주는 묵직함을 언젠가 느낄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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