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가 주는 위안
피에르 슐츠 지음, 허봉금 옮김 / 초록나무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약학과 심리학을 전문으로 하는 의사 <피에르 슐츠>의 책 <개가 주는 위안>은 ‘반려견과 소통하는 행복심리학’이라는 부제에서 보는 것처럼 개라는 동물에 대한 저자의 각별한 관심과 애정이 엿보이는 책입니다. 그리고 강아지 세 마리가 사이좋게 머리를 맞대고 책상위에서 잠든 모습을 담은 사진으로 표지를 장식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을 읽을 수 있게 합니다. 저자는 글머리에서 이 책을 쓴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개가 얼마나 좋은 동물인지 그저 칭송만 하자는 것이 아니라 어떤 연유에서 도시인들이 반려견과 함께 살고 있는지 그 연유를 분석하자는 것이다.(4쪽)”

저자는 개에 관한 다양한 종류의 자료들을 발굴하여 해석하고 있습니다. 개의 계통발생과 유전에 관한 자료, 야생동물인 개를 가축으로 길들이는 과정과 개의 행동에 관한 자료, 등등입니다. 하지만 얼마 전에 읽었던 스티븐 부디안스키의 <개에 대하여; http://blog.joinsmsn.com/yang412/12325418>를 인용한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바로 저자가 객관적 시각에서 개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는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책을 읽어가면서 부디안스키가 자료를 인용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던 개에 대한 편견”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증명하고 있습니다만, 슐츠 역시 다양한 자료를 인용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견”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람의 시각에서 개라는 동물의 행동양식과 생각까지도 이해하려하는 일반인들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라 보여집니다. 

그 첫 번째는 개의 기원에 관한 내용입니다. “인간은 야생동물인 개를 수백년 동안 길들인 결과 가축으로 만든다는 목표를 달성해서 옛날과 같은 모습으로 개와 사람이 협력하게 되었다.(11쪽)”고 하여 인간의 필요성에 의하여 개를 가축화하는데 성공했다는 종래의 주장을 따르고 있습니다. 부디안스키의 설명에 따르면 야생개가 먹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인간주위를 맴돌던 끝에 인간의 삶에 파고들게 되었다는 주장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저자는 개와 인간이 먼 옛날 공생관계를 이루고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공생관계의 기본인 주고-받음이 균형을 이루는 점이 전제가 된다고 함에 있어, 인간사회에 들어와 먹이를 해결한 개가 인간에게 준 것이 무엇이었는지 명확하지 않다. 그렇다면 개가 인간에게 기생하게 된 것이라 볼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보면 개도 사람에게 ‘젖소’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공생관계를 기정사실화하려는 의도를 내비치고 있습니다. 

“고통받고 있는 주인의 병을 개가 떠맡아서 주인 대신 죽을 수도 있다고들 한다.(55쪽)”고 적었습니다. 이런 주장 역시 철저하게 사람의 시각에서 생각한 결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집안에 이런 사례가 있었습니다. 위암으로 수술받고 투병중인 매형 집에서 오래 같이 살던 개가 어느 날 죽게 되었습니다. 누이가 오랫동안 아끼던 녀석이라서 몹시 안타까워하면서도 아마 매형의 병을 대신해서 죽었나보다고 위안을 삼는 경우를 보았는데, 매형을 간병하느라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기 때문에 죽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때문에서 오는 변명일 수도 있겠습니다.  

“사자나 호랑이를 만나게 되면 내 개는 나를 위하여 한순간도 주저하지 않고 싸우려 달려들 것이다.(56쪽)”라는 콘라도 로렌즈의 말을 인용한 것도 대부분의 실제상황이라면 꼬리를 말고 먼저 달아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점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기에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강아지”라는 속담이 내려오는지도 모릅니다.  

개의 지각작용에 관한 글에서도 주인이 집에 도착하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다는 이야기(59쪽)에 관해서도 부디안스키는 이미 개의 일반적인 행동양식을 통해서 개가 특별한 지각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증명한 바 있지만, 저자는 이와 관련된 자료는 외면하여 개에게 특별한 대우를 하고 있습니다. 

슐츠는 개의 신분상승이 눈부시다는 점을 당연하다는 듯이 적고 있습니다. “인간은 개나 다른 반려동물에 대해 때로는 괴상스러울 만큼 지나친 행동을 하고 있다. 그래도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과 가까워져서 그에 따른 혜택을 누리고 있는 여러 종류의 동물 중에서도 개는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139쪽)”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우리 집에 불이나면, 나는 아이들보다 먼저 개를 구할 것이다.(183쪽)”는 발언을 한 사람이 있었다면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오랫동안 인간과 생활을 같이해온 개라는 동물이 탐색견, 양치기개, 사냥개, 등과 같이 다양한 목적에 맞도록 품종이 개량되어 인간의 삶에 도움을 주어온 점은 분명 치하를 받을만한 일입니다. 또한 최근들어 그 활동영역을 넓혀 사람의 질병치료에 도움을 주는 치료견 뿐 아니라 외로운 사람 곁을 지키는 반려동물의 차원으로까지 활용되고 있는 점도 인정할 수 있지만, 개와의 눈치싸움에서 밀려 주도권을 넘겨주고 개에 매달려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볼 일입니다. “개는 개일 뿐” 아니겠습니다. 

저자는 반려견의 위로와 치유에 관한 연구를 통해 현대인의 외로움과 인간관계를 재조명해오고 있다고 합니다만, 현대인의 외로움이 어디에서 오는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반려견에서 위로를 찾는다는 발상은 마치 마약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현실 회피적이라는 느낌이 들뿐 아니라 인간관계를 회복시키기보다는 현대인의 고립을 악화시키는 쪽으로 움직이게 하지 않을까 우려되기도 합니다. 

프랑스어 번역서인 탓인지 책읽는 흐름이 조금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클린턴 대통령의 개인사에 관한 문제로 우리에게 친숙한 르윈스키를 레빈스키로 번역한 것(176쪽)이나 헨리왕 군대에 대한 곳에서 ‘도그(116쪽)’라고 적은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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