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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자격 - 고씨 부자의 유럽 42일 생존기
고형욱.고창빈 지음 / 사월의책 / 2011년 7월
평점 :
영화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푸짐하게 담아 재미있게 읽었던 <영화는 끝나도 음악은 남아있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255642>의 저자 고형욱님이 중학생 아들과 둘이서 유럽을, 그것도 42일에 걸쳐서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고 영국까지 5개국을 돌아본 이야기를 책으로 냈다고 해서 호기심이 일었습니다. 남자들은 아들과 같이 목욕탕에 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것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다는데, 무려 42일씩이나 같이 먹고 자고 했다는 말이니 일단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로 몇 년 만에 두 아들도 함께 가는 여름휴가를 부산으로 다녀오면서 주변에서 원시인 아니냐는 시선을 받고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큰 아이와 대학을 졸업할 나이인 둘째까지 “모두 가족여행에 따라갔단 말이지요?”라는 질문입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적부터 가족이 모두 움직이는 여행을 자주 떠나곤 했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는 일년이면 10일짜리 여행을 두세번 다녀오고 주말이면 2박3일로 살고 있던 미네소타주를 이잡듯 샅샅이 뒤져 구경하곤 했는데, 초등학교 저학년인 큰 아이와 학교에 가기 전인 둘째는 차만 타면 티격태격 싸우곤 했습니다. 오죽하면 인적없는 시골길에 작은 녀석을 내려두고 차를 출발시키는 만행까지 저질렀겠습니까?
열흘여행을 다녀오려면 사전준비를 하는데 한달 정도는 들여야 큰 실수가 없는데, 미리 전체 여행지의 숙소까지 예약하고 다니는 분들과는 달리 제 경우는 코스를 면밀하게 검토하여 짜지만, 숙소는 일정에 따라 현지에서 결정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때로는 자정까지 숙소를 정하지 못하고 운전대를 잡아야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제 경우는 미국에서는 가본 곳이 꽤 되고 여행의 패턴이 익숙하다싶어 언제라도 출발할 수 있지만 유럽은 헝가리, 핀란드, 독일, 프랑스 그리고 영국까지 네 번 정도 다녀온 것이 전부라서 아직도 두려움 같은 것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학회, 회의 혹은 조사차 방문했기 때문에 개인적인 시간을 별로 낼 수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유럽을 아들과 단둘이서 42일 동안이나 다녀왔다는 말에 일단은 부럽기도 하고, 까짓거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작가의 전작을 통해서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야기를 참 쉽고 재미있게 풀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부전자전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재능을 아들이 물려받는다는 말입니다. 저자의 아드님 역시 글솜씨가 만만치 않다는 것도 확인되었습니다. 책표지를 장식하는 부자의 사진을 보면 붕어빵이 따로 없구나 싶은데 재능도 많이 닮은 것 같습니다.
부자가 같이 한 여행이야기는 모두 60편입니다. 아버지가 42편을 그리고 아들이 18편을 쓰고 있습니다. 아참 중요한 이야기를 빠트렸습니다. 중3에 학교성적은 중간쯤 하는 아들과 말을 섞은 기억이 별로 없다는 아버지로서는 무언가 특단의 조처가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다 자란 아들과 아빠가 아무런 경험도 추억도 공유하지 못한 채 영영 제 갈길로 가버릴 것도 걱정되고 해서 유럽여행을 같이 하기고 했다는 것입니다. 요즘 방송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남자의 자격>과 비슷한 컨셉이라고 할까요?
여기서 저도 한마디 해야 하겠습니다. 큰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학교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건성하곤 했는데, 중2 여름방학 때 제가 같이하던 진료동아리의 하계봉사활동에 데리고 가서 하루를 같이 지낸 적이 있습니다. 집에 돌아오면서 먼 훗날 아빠와 함께 봉사활동을 같이 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던 것이 좋은 효과를 냈던 것 같습니다. 이제 의과대학을 졸업하였지만, 아직은 봉사활동을 같이 갈 형편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그때 약속은 언젠가는 지켜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두 사람의 유럽여행의 주제는 “미술과 음악 그리고 유럽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지켜보기”, 그리고 “방문한 도시의 어느 한 공간과 자주 대면하면서 친해지기”입니다. 보통사람들 같으면 생각해내기 어려운 주제입니다. 제 경우는 제한된 시간에 더 많은 곳을 보아야 할 것 같아 일정을 빠듯하게 잡아 날아다니다 시피한 것하고, 아이들에게 교육과 관련된 곳, 예를 들면 보스톤에서는 하바드대학과 MIT대학을 돌아보고, 로체스터에서는 메이요 클리닉을, 그리고 뉴욕에 가는 길에는 뉴헤븐에 있는 예일대학을 구경하는 식이었습니다. 지금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합니다만, 그래도 증명사진으로 남아 있으니 할말은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고형욱 작가 역시 “하지만 나는 투우보다는 창빈의 표정에 관심이 더 많다. 창빈이에게는 하나라도 더 보여주고 싶다.(65쪽)”로 속내를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아빠의 관심이 같이 하는 시간이 늘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창빈에게 전해져서 처음 방문한 미술관에서 본 거장의 작품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던 창빈이 점차 미술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또렷하게 정리해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제가 보기에도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술이라는 게 뭔가 달라야 되잖아. 옛날 화가들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그렸잖아. 하지만 현대 화가들은 자기 생각을 그린 것 같아.(208쪽)” 이 정도면 전문가 수준의 생각이 아닐까요(저와 비교하면 당연한 일이겠구요).
대학에 들어가 사귄 친구들과 홍도여행을 갔는데, 그 유명한 태풍 빌리를 만나 성당에서 며칠을 갇혀 지낸 적이 있습니다. 4팀이 같이 묶이게 되었는데 다 같이 어울리다 보니 같이 간 팀과 갈등이 생겼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무리 부자지간이라고는 하지만 갈등이 없을 수 없겠죠? 특히 요즘 아이들이 아버지 눈치를 얼마나 보던가요? 출발부터 티격태격, 아버지는 참을 인(忍)을 몇 개씩 써가면 참기도 하고 부딪히기도 하면서 서로를 이해해가는 모습도 보기에 참 정겹고 좋은 것 같습니다. 결국 “나는 유럽에 관광을 하러 온 게 아니다. 아들의 얼굴을 제대로 보기 위해 온 것이다. 한 달 넘게 같이 지내면서 서울에서는 볼 수 없었던 아들의 얼굴을 본다. 얘한테 이렇게 다양한 표정이 있었구나. 오랫동안 함께 여행을 다니다보니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 외에 아들의 내면을 약간은 더 느끼게 된다. 아들의 표정을 통해 여행의 참맛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유럽을 발견하는 것보다도 더 큰 발견이다.”라고 적은 것처럼 고형욱님은 아들과 함께 하는 유럽여행을 통하여 아들과의 거리를 좁히고, 아들의 마음에 무언가를 심어주는데 성공하신 것 같습니다. 여행을 마친 다음 해 고1때 창빈이가 전교2등을 먹은 것은 조그만 부상(副賞)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아! 잊을 뻔 했습니다. 창빈이가 주로 찍었다는 사진은 정말 예술입니다. 사진을 보니 더욱 가보고 싶어지는 유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