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2 - 바람 부는 길에서 동문선 현대신서 93
피에르 쌍소 지음, 김주경 옮김 / 동문선 / 2001년 5월
평점 :
절판


 

“나는 지금 어느 길 앞에 서 있다. 이 길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는지, 그것은 나도 모른다. 아니, 어디론가 데려가 주기는 할 것인지조차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길이 나를 무언가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리라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다.(9쪽)”
일찍이 느림의 미학을 우리에서 설파한 피에르 쌍소의 느림에 관한 두 번째 이야기는 ‘바람부는 길에서’라는 부제처럼 ‘길’이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길에 대한 이야기를 앞에 인용한 글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제가 살 수 있는 삶의 반환점을 돌고 있다고 생각되는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어느 날 세상에 태어난 우리네 삶이 바로 인생이라는 먼 여행길을 떠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하는 최희준씨의 노래 하숙생의 가사말이 가슴을 적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쌍소는 다양한 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시골 동네길로부터 숲속에 난 작은 오솔길, 자전거를 타고 가는 길, 기찻길, 고속도로, 그리고 그 길에 얽힌 이야기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가 전하는 말을 듣고 있다 보면 바로 내가 그런 길을 걸은 기억이 튀어나와 깜짝 놀라게 합니다. 먼저 ‘자전거를 타고 가는 길’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중고등학교에 다닐 적에는 걸어서 20~30분 걸리는 학교엘 자전거를 타고 다니고 싶어 자전거를 사달라고 많이 졸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청소년기의 우정, 그리고 오늘날엔 사라져 버린 시골의 들판은 얼마나 자전거와 잘 어울리는가!”라고 시작하는 자전거길에 대한 쌍소의 이야기야말로 저의 청소년기의 바람과 꼭 맞아 떨어지는 것입니다. 친구들과 같이 자전거를 타고 들판으로 동네를 넘나들면서 내달리면서 삶을 공감하는 일이야말로 청춘을 아름답게 하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낭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중2때 던가 어느 일요일에 군산에서 전주까지 42km정도 되는 길을 “자전거로 한 번 갔다 와 볼까?”하는 친구의 바람에 우쭐해서 군산을 출발했지만, 절반인 익산에도 가보지 못하고 되돌아오고 말았는데 돌아오면서 힘이 빠져 헉헉대다가 지나는 자동차에 사고가 날 뻔하기도 한 적도 있습니다.
요즈음은 기차를 타는 일이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만, 기차여행, 특히 완행열차에 얽힌 추억은 참 많습니다. 제 기억에 가장 또렷하게 남아 있는 기차여행은 남원에서 근무할 때 갑자기 쏟아진 눈 때문에 차를 두고 기차를 타고 서울로 향하면서 차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설경이 너무 황홀했을 때입니다. 그리고 미국 미시간주에 있는 Sault Ste Marie에 있는 철도길이 가을철 단풍과 겨울철 설경이 참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가보지 못해서 지금도 아쉬운 곳으로 남아 있습니다. 쌍소는 기찻길의 매력이 제대로 살아나려면 아름다운 풍경을 해쳐서는 안되고 그 아름다운 풍경 속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을 고려한다면 동해안을 따라 달리는 기찻길도 승객에게 큰 위안을 주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는 가보아야 할 길이기도 하구요.


기찻길과 관련한 쌍소는 미처 확인하지 못하고 기찻길 근처에서 밤을 보내면서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말하고 있습니다만, 저 역시 캐나다를 여행하면서 나이아가라폭포 근처에서 하루밤을 묵게 되었을 때 바로 옆으로 기찻길이 지나는 것을 모르고 모텔을 정하는 바람에 밤늦게까지 기차가 지날 때마다 잠에서 깨는 바람에 다음날 운전하는데 애를 먹었던 추억도 지금은 아름답기만 합니다.

고속도로에 대한 쌍소의 이미지는 상당히 부정적인 것 같습니다. 고속도로의 건설 자체가 자연파괴적인데다가 빠른 이동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느림의 미학과는 거리가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지금처럼 과속감시카메라가 없던 시절에는 교통순경이 과속을 감시하였기 때문에 위험지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날아다니다시피 운전을 하기도 했습니다. 요즈음은 과속감시카메라가 많아졌다고는 해서가 아니라 과속을 하는 경우에는 아무래도 바짝 긴장해야 하는 것이 싫어지는 탓에 규정속도를 지키면서 여유를 보이게 되는 것 같습니다. 굳이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고요한 방에 들어앉아 휴식할 줄 모른다는 데서 비롯한다.(217쪽)”는 파스칼의 경구를 기억하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씽소는 특히 시골길을 예찬하고 있습니다. “흔히 시골길은 오르막길과 내리막길로 기복이 심하다. 기복이 많은 길을 걷고 있으면, 지구의 등뼈 위를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98쪽)”고 한 비유는 정말 묘한 느낌을 가지게 합니다. 몇 해 전부터 아내와 함께 서울 도심 혹은 인근에 있는 야트막한 산책길을 따라 걷고 있습니다. 쌍소가 말하는 지구의 등뼈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이 드는 코스가 어디일까 되짚어 보았더니, ‘도시 위의 산책로, 능선’이라는 부제를 달았던 안산근린공원에서 백련사에 이르는 능선길이 딱인 듯합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1872339). 서울의 도심을 굽어보면서 바위산의 능선을 따라가는 코스는 정말 지구의 등뼈를 밟는 느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산책길을 따라가면서도 더 여유를 부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리고 있습니다만, ‘느림의 미학’을 더 깨우치게 되면 지금보다 더 주위를 살피고 숲을 느끼게 될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읽은 월든에서도 호수의 새로운 발견이 화두가 되었습니다만, 저 역시 마음속에 호수를 담고 있어서 호수를 발견한 쌍소의 생각에 공감하게 됩니다. “그곳의 산들을 비추어 주고 있는 맑은 호수가 하나 필요했다. 마침 그런 호수를 발견하였고, 나는 망설이지 않고 얼음처럼 차가운 물 속에 몸을 담갔다. 그리고 차갑게 얼어버린 깨끗한 몸이 되어 물 속에서 나왔다. 그러자 나를 친절하게 받아 준 이 지구에게 다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139쪽)”라는 쌍소의 말을 듣다보면, 느림의 미학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들도록 만드는 것 같습니다.

제가 태어나던 1954년에 개봉된 <길; La Strada>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명화극장을 통해서 보았는지 기억이 가물거립니다만, 트렘펫으로 연주되는 애절한 주제가 ‘젤소미나의 테마’는 리노 로타가 작곡한 것으로 듣는 이의 마음에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스토리는 떠돌이 차력사로 나오는 안소니 퀸이 젤소미나라는 지능이 조금 모자라는 여인을 사서 조수로 데리고 다니다가 써커스단에서 동료와 갈등을 빚는 과정에서 젤소미나와 헤이지게 되는데 세상을 떠돌아다니다가 젤소미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나는 외톨이라고 절규하면서 후회한다는 스토리라고 합니다. 이 영화에서 나오는 ‘길’의 의미는 인생의 험한 세파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평화롭던 어느 일요일 갑자기 몰아닥친 전쟁을 피해서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모를 피난길에 올라야 했던 우리 부모님들이 겪은 것처럼 우리의 아픈 역사에서도 ‘길’은 깊은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쌍소 역시 같은 경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2차 세계대전 기간이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그해 6월의 40일간. 국가적인 재난의 시간에, 우리들이 기도하고 신음하고 사랑하고, 또 먹고 자기도 했던 곳이 바로 길 위였다.(26쪽)” 아마 우리 부모님들도 같은 사정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쌍소가 길은 샘이고 빛이라고 생각한 것처럼 우리 부모님들도 길 위에서 보내야 했던 위기의 순간에도 희망을 버리지 않아 결국은 오늘날의 번영을 이루어내어 우리에게 전해주셨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나는 걷는다. 걸으면서 지평선에 점점 가까이 가고 있는 것이라 믿고 있지만, 절대로 지평선에 닿을 순 없을 것이다.(271쪽)”라고 쌍소는 말하고 있습니다만, 살아간다는 것이 어떠한 형태로든지의 길을 걷는 것이라고 한다면 걷고 걷다보면 언젠가는 생을 마감하는 지평선에 이르게 될 것이니 서두른다고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면 삶을 여유있게 즐기는 태도 역시 중요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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