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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이레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1845년3월 말경, 나는 도끼 한 자루를 빌려 들고 월든 호숫가의 숲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호수 가까이에 집 한 채를 지을 생각으로 곧게 뻗은 한창때의 백송나무들을 재목감으로 베어 넘기기 시작했다. (…) 내가 일한 곳은 소나무가 우거진 기분 좋은 언덕배기였는데 나무들 사이로 호수가 보였고, 어린 소나무와 호두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는 숲 속의 작은 빈터도 보였다.(60-61쪽)”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자신으로부터 사회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성찰을 이루게 된 월든 호숫가의 오두막은 이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지금은 허물어져 사라져 버렸지만, 어렸을 적에 명절 때면 차례를 지내려 찾던 종가댁 마당 아래쪽에는 사랑채가 있었습니다. 툇마루에 올라서면 작은 윗방과 아랫방이 이어져 있는데, 종가댁 할아버지께서 아랫방에 기거하셨다고 합니다. 서안에 올려진 서책을 읽으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종가댁에서는 툇마루에 할아버지께서 읽으시던 서책들을 펼쳐놓고 거풍을 시키곤 하셨습니다.
툇마루에 올라서면 마당가에 서있는 나무 사이로 남쪽으로 널찍한 호수가 바라다 보입니다. 호수를 바라보면 어느 새 마음이 활짝 열리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부터 이런 호숫가에 집을 짓고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른 아침에는 책을 읽고, 해가 질 무렵에는 호숫가를 산책하고, 달이 뜨면 음악을 듣거나 아니면 삶에 대한 이러저런 생각을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생각의 열매를 글로 남기면 금상첨화가 될 것 같습니다. 소로우가 <월든>을 남긴 것처럼 말입니다.
<월든>은 호숫가의 오두막이 완성된 1845년 7월부터 1847년 9월까지 2년여 동안 그곳에서 홀로 지낸 소로우의 숲생활의 기록입니다. <월든>을 통해서 유추해본 소로우의 숲생활은 동서양을 넘나드는 다양한 책들을 읽고 그 의미를 새기거나, 월든 호수와 주변 숲을 거닐면서 느끼는 계절의 변화와 생명의 경이를 미세한 점까지도 놓치지 않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숲속 오두막을 찾아오거나 숲속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나누는 소소한 이야기도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소로우의 사념은 숲과 호수를 중심으로 하는 자연에 머물지 않고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문명사회, 특히 미국의 사회정책 등에 대한 쓴소리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침대는 야간의 의복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 주거지 안의 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서 우리는 새들로부터 둥지와 가슴털을 훔친다. 마치 두더지가 굴속 깊은 곳에 풀과 나뭇잎으로 된 잠자리를 마련하는 것처럼 말이다. 가난한 사람은 세상이 차다고 한탄을 한다. 우리가 느끼는 고통의 대부분은 신체적 냉기 이상으로 사회적 냉기에 기인한다.(25쪽)”
사실 저도 몇 년째 집근처에 있는 양재천에 산책을 나가고 있습니다. 산책을 하는 동안 양재천에서 느끼는 변화를 사소한 것까지도 놓치지 않으려 살피곤 합니다만, 소로우와는 차원이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시간의 흐름과 자연을 느끼는 방식의 차이, 두 가지 정도일 것 같습니다. 제가 양재천에 산책을 나가는 큰 이유는 자연을 관조하려는 것보다는 건강을 유지하려는 목적이 큰 탓에 비교적 빠른 속도로 걷기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재천의 변화는 보고 들으면서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느리게 사는 법을 알고 있었던 것 같은 소로우는 천천히 걸으면서 자연에 스스로를 담기 때문에 그 변화를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월든>을 읽어나가면 자연에 대한 소로우의 세심한 관찰과 사념의 깊이에 매료될 수밖에 없습니다. “들판과도 같이 넒은 물은 공중에 떠 있는 정기(精氣)를 반영한다. 그것은 위로부터 끝없이 새로운 생명과 움직임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의 중간적인 본성을 지니고 있다. 땅 위에서는 풀과 나무들만이 흔들리지만 물은 그 자체가 바람에 의해 잔물결이 일게 된다. 나는 수면에 미풍이 불어 지나가는 곳을 빛줄기나 빛의 파편이 번득임을 보고 알 수 있다. 이처럼 우리가 호수의 표면을 내려다볼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언젠가 우리는 공가의 표면을 내려다보며 한층 더 신묘한 정기가 어디를 스쳐 지나가는가를 보게 될 것이다.(271쪽)”
이웃 오두막에 사는 아일랜드 이민자 존 필드의 대화를 통하여 소로우가 원하는 미국이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있습니다. “참다운 미국은 그런 것들(차와 커피와 고기)이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생활양식을 자유로이 추구할 수 있는 그런 나라여야 하며, 또 노예제도나 전쟁을 국민이 지지하도록 국가가 강요하고, 그런 물건들을 사용하는 데서 직접 간접으로 초래되는 쓸데없는 비용을 국민이 부담하도록 강요하는 일이 없는 나라여야 하는 것이다.(296쪽)” 이러한 그의 생각은 1846년 7월 멕시코 전쟁에 반대하여 인두세 납부를 거부하여 투옥되었던 경험에서 나온 것이며, 부당한 시민 정부에 대한 합법적인 개인의 저항을 주장한 에세이 <시민 불복종(1849)>는 마하트마 간디의 인도 독립운동 및 마틴 루터 킹의 흑인 민권운동에 영감을 주었다고 합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우리는 스스로에게 관대한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그는 스스로에 대한 비판에도 차별을 두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과거 학교경영에 간여하면서 가졌던 생각도 비판하고 있습니다. “같은 인간에 대한 사랑의 감정에서가 아니고 단지 먹고살기 위해서 아이들을 가르쳤으므로 그것부터가 실패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100쪽)” 오늘날 교육에 종사하는 분들 가운데 먹고사는 문제를 떠나서 인간에 대한 사랑의 감정으로 임하는 분들이 얼마나 될까 생각합니다. 특히 이념까지 끼어들다 보면 인간에 대한 사랑은 발붙일 자리가 없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소로우는 월든호수로 간 이유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숲 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서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해보려는 것이었으며, 인생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했던 것이며,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내가 헛된 삶을 살았구나 하고 깨닫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삶이 아닌 것은 살지 않으려 했으니, 삶은 그처럼 소중한 것이다.(129-130쪽)”
그러면 왜 호수였을까요? “호수는 하나의 경관 속에서 가장 아름답고 표정이 풍부한 지형(地形)이다 그것은 대지의 눈이다. 그 눈을 들여다보면서 사람은 자기 본성의 깊이를 잰다.(268쪽)” 소로우는 대지의 눈을 통해서 자신의 본성을 들여다보려 한 것이고, 자신을 발견해낸 것입니다.
앞에서 언젠가 기회가 되면 호숫가 작은 집에서 살고 싶다는 저의 작은 소망을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그 소망이 언제 이루어질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다람쥐 쳇바퀴 돌리 듯 세상살이에 매몰되어 정신없이 사는 삶에 매달리다보면 정신의 샘이 말라붙어버릴 것 같다는 걱정이 남습니다. 이제라도 삶에 희망을 물줄기가 흘러내릴 수 있도록 마음속에 월든호수를 담아봐야 하겠습니다. 마치 ‘쉴 새 없이 그리움을 솟아 올리는’ 최홍규 시인님의 호수처럼 말입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0925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