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말테의 수기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문현미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평점 :
제가 참여하고 있는 고전독서회의 3월 모임에서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를 이야기했습니다. 릴케는 1875년 12월 4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보헤미아 왕국의 프라하에서 태어난 오스트리아의 시인이자 소설가입니다. 일찍부터 꿈과 동경이 넘치는 서정시를 썼습니다.
고전독서회에서 이번에 이야기한 <말테의 수기>는 로뎅을 연구해달라는 의뢰를 받고 1902년 프랑스 파리로 가서 로뎅의 비서가 되면서 로뎅의 집에서 지내다가 다시 하숙집으로 거처를 옮긴 뒤에 썼다고 합니다. 그는 파리에 도착해서는 대도시의 빈곤과 침체에 놀랐고, 특히 하숙을 하면서 무의미한 것, 타락과 암흑, 만연해 있는 악을 경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원래 제목이 <말테 라우리츠 브리게의 수기>인 <말테의 수기>는 ‘체념의식과 개개인의 고유한 삶이나 죽음은 아랑곳없고 질보다 양이 판을 치는 대도시의 양상에 대한 공포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절망의 기록’이라고 옮긴이는 이야기합니다.
이와 같은 배경을 가진 탓인지 이 작품은 쉬이 읽히지 않았습니다. 관찰하는 대상이 끊임없이 바뀌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화자가 주위의 인물들에 대하여 기술한 내용이 마치 프루스트를 읽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1부와 2부로 나뉘어있지만, <파리의 인상> <죽음> <시와 고독> <소년시대의 추억> <사랑> <신(神)> <베니스의 여행> <탕아(蕩兒)의 전설(傳說)> 등의 주제에 관한 화자(실제로는 릴케)의 감상이 서술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야기의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무겁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은 릴케가 파리에 도착해서 받은 인상이 어두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죽음이란 주제를 맞닥트리게 된 것도 한 몫을 한 듯합니다. 20세기 초반의 유럽의학은 지금과는 판이하게 다른 형편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병원에 간다는 것은 죽음을 맞을 가능성이 높다고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업혁명으로 도시가 활기를 띄고는 있지만, 한편으로는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을 릴케는 일찍 깨닫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현대사회의 병폐가 그 무렵부터 이미 드러나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파리의 뒷골목에 있는 하숙집에서 지내면서 뒷골목의 분위기를 냄새로 표현한 부분이 놀라웠습니다. 보는 것을 배우고 있다더니 프루스트의 작품 분위기를 닮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릴케는 일찍부터 시를 써왔고, 파리에 가기 전에는 러시아를 방문하고서 많은 시를 썼던 것인데, 파리에와서 시쓰기에 대한 생각이 변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가 파리에서 보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고 고백한 것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과거에는 시는 감성을 바탕으로 쓰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인데, 이제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한 줄의 시를 쓰기 위해서는 수많은 도시를, 사람들, 그리고 사물들을 보아야만 한다.(27쪽)’고 했습니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은행(Zeitbank) 혹은 시간의 은행(Bank fűr Zeit)이라는 개념을 소개한 것도 놀라웠습니다. 시간을 주고받는다는 생각은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가 생각났습니다. 회색인간들의 꼬임에 넘어가 사람들이 자신의 시간을 그들에게 빼앗긴다는 이야기입니다.
작품해설에서는 릴케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가장 릴케다운 죽음이라고 하면서 ‘장미꽃 가시에 찔린 것이 덧나서 백혈병을 일으켰고 이것이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301쪽)’라고 했습니다만, 장미꽃 가시에 찔려 백혈병을 얻었다는 것보다 장미꽃 가지에 찔린 탓에 백혈병이 발견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의 비문으로 썼다는 시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장미, 오 순수한 모순이여, 기쁨이여, 그 많은 눈꺼풀 아래 그 누구의 잠도 아닌 잠이여 (Rose, oh reiner Widerspruch, Lust, / Niemandes Schlaf zu sein unter soviel Lide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