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키 재기 외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33
히구치 이치요 지음, 임경화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5월
평점 :
다음 달 떠나기로 한 일본문학기행에서 다루게 될 4명의 일본 작가 가운데 히구치 이치요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녀의 <키재기>가 논의될 것이라고 합니다. 을유문화사의 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된 이구치 이치요의 작품집 <키재기(외)>에는 표제작 <키재기>를 비롯하여 모두 6편의 작품들이 실려 있습니다.
히구치 이치요는 메이지유신이 시작된 직후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에도시대가 메이지유신으로 넘어가는 격변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새로운 서구문명이 밀려들어오던 시기였지만 에도시대의 사회적 풍조가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당시의 여류소설가들이 주로 상류 사교계를 무대로한 결혼을 다루었던 것과는 달리 다양한 계층의 여성들의 삶을 다루었습니다. 특히 지금의 도쿄의 중심지역이 된 에도에 있던 요시와라 유곽이 <키재기>의 무대가 되고 있습니다. 말미에 있는 해설을 보면 ‘요시와라의 구시대적 활기와 메이지적인 어둠, 사치와 빈곤, 해학과 슬픔이 교차하는 세계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소년소녀들과 그들의 사랑을 그려냈다(262쪽)’라고 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변천상이 일본을 뒤따라간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만, 이치요의 작품들을 읽어보면 기시감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첫 작품 <섣달그믐>의 주인공 오미네는 부모없이 삼촌집에서 자라다가 곤궁한 삼촌을 돕기 위해 부잣집의 하녀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 부잣집 사람들의 행태 역시 과거 우리나라의 졸부들이 보여주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십삼야>의 여주인공 오세키 역시 높은 신분의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지만 남편의 출세에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하면서 경멸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그녀를 흠모했던 로쿠노스케는 삶에 의욕을 상실하고 인력거를 끄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남편과 헤어질 결심을 하고 친정에 왔던 오세키가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은 포기를 하고 집으로 가는 길에 로쿠노스케를 만난다는 설정도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갈림길>의 남주인공 기치는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이웃집 오쿄 누나에게 의지하는데, 그녀마저도 미천한 신분을 벗어나려 부유한 남성의 첩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을 보면서 크게 실망하게 됩니다. <나 때문에>에서는 하급관료 요시로가 미모의 아내와 결혼하여 진실한 사랑을 꿈꾸지만 출세욕이 전혀 없는 소시민적인 요시로에 실망한 아내가 떠난 뒤로 돈을 뒤쫓는 속물이 되고 만다는 이야기도 언젠가 들어본 듯한 이야기입니다.
<키재기>의 무대가 에도의 유곽 요시와라라고 했습니다만, 당시 유곽은 도쿠가와 막부가 공인되고 관리되는 공간이었습니다. 에도의 요시와라는 교토의 시마바라, 오사카의 신마치와 함께 3대 유곽으로 꼽혔지만, 일본의 유곽 가운데 가장 유명한 유곽촌으로 1893년에는 요시와라에 무려 9천명이 넘는 여성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키재기>에서는 요시와라의 유녀들을 중심으로 한 남녀관계가 가감 없이 서술되거나 유곽촌에 살던 소년 소녀들 사이에 오가는 사연들이 펼쳐집니다. 하지만 중심이 되는 이야기의 줄거리는 요시와라에 거주하는 소년과 소녀들의 풋풋한 사랑이 다루어집니다. 8월의 축제부터 11월의 축제까지 이어지는 이야기는 요시와라의 최고 유녀의 동생 미도리(14세)를 중심으로 전당포 아들 쇼타로, 인력거꾼 아들 산고로 등의 ‘큰길파’와 토목기술자의 아들 초키치를 중심으로 한 ‘골목파’ 아이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습니다.
골목파 아이들은 큰길파 아이들에게 맞대응하기 위해 절의 주지 아들인 신료를 끌어들여 8월 축제 때 큰길파의 행사장에서 난동을 부렸다. 초키치는 그들의 행패를 말리는 미도리에게 몹쓸 소리를 해서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 이후 미도리는 학교에도 가지 않고 집에 틀어박혀 있다가 11월 축제 때는 유녀 모양으로 머리를 하고 나타납니다. 그리고 신뇨는 승려 공부를 하기 위해 동네를 떠나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됩니다. <키재기>는 요시와라 유곽촌 아이들의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