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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의 무희.천 마리 학.호수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39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신인섭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12월
평점 :
<설국>으로 대표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작품집을 읽었습니다. 다음달 떠나는 일본문학기행에서 다룰 예정인 작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968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일본인으로는 2명의 화학상 수상자에 이은 세 번째 노벨상 수상자이며 문학상으로는 처음 받았습니다.
곽형덕은 일본 전후문학과 노벨문학상-현실부정과 아시아와의 연대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에서 “가와바타의 노벨문학상 수상(1968)은 일본의 전후의 폐허로부터 일어서 경제 선진국의 일원으로 다시 복귀한시점에서 일본/일본인의 자명성을 강화하는 계기로 작용했다.”라고 했습니다. 그의 수상연설문 ‘아름다운 일본의 나-그 서설’이 때로 국수주의로서의 ‘일본의 미’를 강조한 연설로 해석되어 왔지만, 그보다는 현실사회부정이 더욱 강하다고 했습니다. 현실의 추악함을 피해 소설 속에 새로운 이상향을 구축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즈의 무희/천 마리 학/호수> 등 야스나리의 작품들을 읽게 된 것도 다음 달로 예정된 일본문학기행에서 다루어진다고 해서입니다. 이즈의 무희(1926년), 천 마리 학(1952년), 호수(1954년) 등 1950년대의 중반에 발표된 작품들인 까닭에 당대는 물론 오늘 날의 우리네 감각으로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 있는 것은 일본인 특유의 감성이 깔려 있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이즈의 무희>을 읽기 시작하면서 기시감이 느껴졌습니다. “꼬불꼬불한 산길로 접어들면서 마침내 아마기 고개에 다가왔구나 싶었을 무렵, 삼나무 밀림을 하얗게 물들이며 매서운 속도로 빗발이 산기슭으로부터 나를 뒤쫓아 왔다.(9쪽)”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라는 설국의 시작부분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야스나리의 작품을 보면 ‘여행’을 통하여 얻은 감각적 표현이 눈길을 끌게 만듭니다. <이즈의 무희> 역시 작가가 1918년에 이즈 지방을 여행할 때 유랑극단을 만났던 경험이 녹아있다고 합니다. 작품의 분위기로 보아서 가극단의 막내이자 무희인 가오루와 인연이 이어질 듯 하였지만 무심하게 헤어지는 결말이 낯설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반면 <천 마리 학>은 꽤나 일본적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다도를 즐기던 선친의 연인이었던 구리모터 지카코의 초청을 받아 엔가쿠 사의 다실에서 열리는 다도 모임에 참석하게 되는데 지카코는 연인의 아들인 미타니 기쿠지에게 제자 이나무라 유키코를 소개하려는 자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의외의 복병이 나타나게 되는데 선친의 여자였던 오타부인과 그녀의 딸 후미코가 다회에 참석한 것입니다.
이해되지 않는 대목은 다회가 끝난 다음 오타부인과 함께 한 기쿠지가 오타부인과 관계를 맺은 것입니다. 아마도 오타부인의 적극적인 몸짓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연인의 아들에게서 연인의 모습을 읽은 탓이었을까요? 그렇다고 해서 기쿠지가 선친의 여인을 안은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오타부인은 기쿠지와의 관계를 눈치 챈 딸 후미코의 감시를 피해 다시 기쿠지를 찾아올 정도로 매몰되었다가 결국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합니다. 그러면서 딸 후미코와 기쿠지가 인연을 맺기를 바랐던 듯합니다. 이번에는 후미코에게서 오타 부인의 모습을 읽은 기쿠지가 후미코와 관계를 맺게 되는 과정에 이르면 작가의 작품세계가 혼란스럽기까지 합니다.
세 번째 작품 <호수>는 이야기가 두 가닥으로 전개되는 바람에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모모이 긴페이라는 남자 주인공은 여성을 미행하는 취향을 가졌는데, 어느 날 미야코를 미행하다가 그녀가 내던진 손가방을 주워 돌려주려 뒤쫓다가 놓치는 바람에 손가방 안에 들어 있던 20만엔을 발견하고 도망을 치게 됩니다. 도망하는 긴페이와 손가방을 잃어버린 미야코가 각각 보이는 행동을 서술하다가 결말에 이르게 되는데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끝까지 설명되지 않은 점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역시 가까우면서도 먼 나라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