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창가의 토토 - 개정판
구로야나기 테츠코 지음, 김난주 옮김, 이와사키 치히로 그림 / 프로메테우스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구로야나기 테츠코의 소설 <창가의 토토> 역시 파킨슨 병으로 진단받고 22년을 투병해온 정신의학과 전문의 김혜남 작가의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https://blog.naver.com/neuro412/223663539509>에서 인용한 것을 보고 읽은 책입니다. 특히 “어쩌면 세상에서 진실로 두려운 것은 눈이 있어도 아름다운 것을 볼 줄 모르고, 귀가 있어도 음악을 듣지 못하고, 마음이 있어도 참된 것을 이해하고 감동하지 못하여 가슴의 열정을 불사르지 못하는 사람이 아닐까.”라는 대목을 인용하였는데, 저는 책을 모두 읽고서도 이 대목을 찾아내지 못하였습니다. 아마도 건성 읽은 것은 아닌지 걱정을 하게 됩니다.
<창가의 토토>는 일본의 유명 방송인이자 사회봉사가로 활동하는 구로야나기 테츠코씨가 자신의 인생 가운데 가장 황금같은 시절이라 할 초등학교 시절을 이야기한 내용입니다. 자연과 친구와 더불어 사는 삶의 아름다움을 가르쳐준 당시의 스승과, 아이들의 인격과 개성을 존중한 수업내용을 풀어놓은 것입니다. 아마도 문부성의 허가를 받은 정규 학교가 아니라 요즘으로 치면 대안학교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시대적 배경이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들기 전의 시기였던 것을 보면 상당히 선구자적인 그런 교육체계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토토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테츠코는 호기심이 많고 천방지축인 아이였던 것 같습니다. 세상만사가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철부지였던 것이지요. 그랬던 토토가 정규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고서 도모에 학원에 들어갔을 때는 선생님들이 이끄는 수업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정화조 뚜껑을 덮어놓은 신문지에 뛰어든다거나 모래더미처럼 보이는 진흙탕에 뛰어든다거나 하는 것을 보면 여전히 충동적이고 상황을 살피는 것보다 행동이 먼저인 점은 여전하지만 말입니다. 이런 아이를 키우는 일도 수월치가 않을 것 같습니다.
당시 일본에 거주하던 조선인에 대한 이야기가 짧게 언급되어 있지만, 토토의 어머니의 입을 빌어서 일본인이나 조선인을 구별하여 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정도로만 언급되어 있을 뿐 작가 자신의 생각이 어땠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조선인 엄마가 아들을 찾는 소리가 ‘한번 들으면 잊을 수 없을 만치 애달피 우는 듯했다.’는 정도로 생각했다는 것이지요.
이야기의 말미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 일본이 참전하게 되면서 전쟁터에서 부상을 당한 군인이 치료받고 있는 병원에 찾아가 위문을 하고, 이웃에 사는 남자들이 전장터로 떠나가고 일용품을 배급받는 어려운 상황을 짧게 적고 있을 뿐 일본이 저지른 전쟁에 대한 저자 자신의 생각은 한 줄도 적지 않았다거나 전후 일본의 사정까지 이야기를 끌어갔더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B-29의 폭격으로 도모에 학원이 불탔다는 이야기, “큰 집의 맏아들이 ‘천황폐하, 만세!’라고 외치며 풀썩 고꾸라져 전사하는 군인의 흉내를 내는 모습을 보면서 참 슬픈 광경이었다”라고 적은 것은 전쟁에 대한 일본 국민, 특히 당시의 어린이들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이야기하는 것을 금기로 여겼는지도 궁금합니다. ‘전쟁만 없었더라면 더욱 많은 학생들이 (고바야시) 선생님의 손을 거쳐 세상으로 나갈 수 있었을텐데’하는 생각이 들어 아쉽고 서글픈 마음뿐이라고 소회를 밝히는 것도 적절치가 않아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제목과 관련한 이야기입니다. 저자는 이 책을 쓸 무렵에 창가족이라는 말이 유행을 했는데, 소외된 있는 층을 이르는 말이었다고, 그래서 자신도 학교에서 왠지 모르게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이런 제목을 정했다고 합니다. ‘窓際族(まどぎわぞく)’이라는 말에서 온 것인데 우리말 그대로 번역하면 ‘창가족’ 정도의 의미로, 일본 기업이나 단체 직장에서 한직으로 몰린 사원이나 직원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왕따가 된 토토가 되나요? 도모에 학원에서는 왕따가 아니라 동무들과 잘 어울리는 아이가 되었으므노 창가족이라 할 수도 없지 않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