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참 좋았더라 - 이중섭의 화양연화
김탁환 지음 / 남해의봄날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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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광우병이 위세를 떨치던 2000년 무렵 유럽에서 수입된 육골분이 가축사료로 사용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제1차 광우병파동이 일었습니다. 그 무렵 식약청에서 근무하던 필자는 일본에서 열리는 해면상뇌증 관련 국제학술대회에 초청받아 우리나라의 광우병 관리에 대하여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발표 자료를 준비하면서 이중섭 화백의 소 연작을 살펴보게 되었고, 그 가운데 한 점을 자료에 넣어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밀리의 서재에서 이중섭 화백의 삶과 그의 작품세계를 뒤쫓은 김탁환 작가의 <참 좋았더라>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현대의 국내소설을 많이 읽지는 않지만 김탁환 작가의 작품은 <혁명>을 비롯하여 여러 편을 읽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의 책 <읽어가겠다>의 독후감을 김탁환 작가님은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이라 할 만합니다.”라고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잘 읽히고 울림을 느끼는 그런 작품들이라는 생각입니다.


이중섭 화백의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참 좋았더라>는 제목처럼 참 좋았습니다. 역사소설의 대가라고 명성처럼 이중섭이 머물고, 걷고, 바라봤을 풍경을 뒤쫓아 전국 곳곳을 누비면서 현장을 취재하고 관련 인물들을 면담하고, 이중섭에 관한 자료를 검토하여 이야기를 엮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김탁환 작가는 화가로서 진면목을 드러낸 때와 장소, 또 그와 같은 솜씨를 선보인 과정과 까닭에 천착했다.”라고 했습니다.


이중섭 화백의 삶은 기구했던 것 같습니다. 해방 전에는 부유한 집안의 배려로 일본으로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6.25동란으로 겨우 몸만 빼내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오면서부터는 어려운 생활을 영위해야 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아내 이남덕(야마모토 마사코)과 두 아들(태현, 태성)을 외가인 일본으로 보내야 했습니다. 홀로 한국에 남은 그는 가족을 그리워하면서도 그림으로 돈을 벌어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 궁리를 하였지만 여의치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부산에서 고군분투하던 그는 통영의 공예가 유강렬의 초대가 가뭄의 단비였을 것 같습니다. 경상남도나전칠기기술원 양성소에서 강사로 재직하며 작품 활동에 매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시기에 이중섭은 공예가 유강렬, 화가 유택렬, 김용주, 최영림, 박생광, 시인 김춘수, 구상 등 전국 곳곳에서 모여든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수차례의 전시를 열었다. 당시 문인이나 예술가들과 어울리던 분위기를 보면 서양의 근대미술의 사조를 우리 전통예술과 어떻게 접목할 것인가에 대하여 치열하게 고민하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히 통영에서 그의 수발을 든 남대일에게 가르쳐 줄 선생 잇구, 배울 교실 잇구, 아틀리에에 연필과 물감과 종애래 함깅도 말로 수두구리한데, 어케 여구메가 지옥이네? 하루하루 소중히 하라우.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 아니라 턴국에서 보낸 한 철이니까니라고 미술수업에 전념하라 설득하는 모습을 보면, 강습소의 학동들에게 미학사를 가르치는 일도 소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해돋이보다는 해넘이에 의미를 두어왔던 것 같은데 이 책을 읽고서 생각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붉은 하늘을 그렸다. 지금까진 뜨거운 낮을 보내고 스러져가는 저물녘을 담으려 했다. 노을이 아무리 붉어도, 수평선 바로 아래엔 막막한 어둠이 뱀처럼 도사렸다. 허전하고 쓸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물녘을 동틀 녘으로 바꿨다. 시작하기 직전의 붉음이요, 점점 밝아지는 붉음이요, 채워가는 붉음이다. 몸도 마음도 차오를 때, 소의 뿔과 입술에도 힘이 실린다. 첫 숨을 토한다.”라는 대목 때문입니다. 하늘가의 붉음에도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우쳤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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