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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그리다가, 뭉클 - 매일이 특별해지는 순간의 기록
이기주 지음 / 터닝페이지 / 2024년 10월
평점 :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에서 여행지에서 만나는 아름다움을 붙드는 방법으로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예술평론가 존 러스킨을 인용합니다. “아름다움을 제대로 소유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며, 그것은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스스로 아름다움의 원인이 되는 (심리적이고 시각적인) 요인들을 의식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의식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것에 관해 쓰거나 그것을 그림으로써 예술을 통해서 아름다운 장소들을 묘사하는 것이다.(277쪽)”라고 하였습니다. 러스킨은 또한 여행을 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것에 더하여 아름다움에 대한 인상을 굳히려면 “말로 그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즉 글로 써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기주의 수필집 <그리다가, 뭉클>을 읽으면서 러스킨의 권고에 충실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상에서 발견한 신비하고 오묘한 삶의 모습을 그림을 그리고 글로 남기다보면 역사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고 쓴 이야기를 유튜브에 올리기 시작했는데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던 것에 힘입어 책을 내기로 했다고 합니다.
작가는 일상에서 만나는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기도 하고, 그 자리에서 그림을 그려 두기도 하는 듯합니다. 사진으로 간직한 장면은 토요일 오전에 그림으로 옮긴다고 합니다. 가장 여유롭고 감정도 말랑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때로는 글감을 찾아 집을 나서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사진을 하는 대학 동기는 사라져가는 풍물을 간직하기 위하여 주말에 집을 나서곤 한다는데 아마도 같은 맥락일 듯합니다.
여행을 좋아하는 저의 눈길을 붙든 대목이 있습니다. “여행을 다닐 때 여행자의 눈은 모든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하다못해 길 옆 잡초 하나에까지 의미를 붙인다. 여행자의 시선은 늘 이래다. 여행지에선 별거 아닌 것들이 특별해지는 이유다.” 여행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고 있는 저 역시 눈길을 끄는 순간을 사진으로 담고 글로 요약해둡니다.
작가는 먼저 ‘나는 이렇게 그림을 그린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기술(?)을 설명합니다. 먼저 화면을 가로 세로로 각각 3칸씩 9등분하여 나누고, 그릴 장면의 원근과 소실점을 좌표에 표시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선을 긋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람, 그리고 사물들은 일정한 틀에 따라 그려넣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채물감으로 채색을 하여 완성한답니다.
목차에서 보는 것처럼 그림을 그리는 일과 관련한 이야기이면서도 이야기에 곁들인 그림들은 다양한 것 같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을 주제로 삼은 이유는 다음 구절에 담겨있지 싶습니다. “그림은 인생이다. 지우개를 쓰지 말고 실수한 선을 그냥 놔둔 채 그대로 거침없이 그려간다. 지금은 마음에 남아 괴롭지만 나중에 실수한 선이 나만의 독특한 문양이 된다. 그렇게 인생은, 그림은 예측할 수 없어 아름답다.”
여행의 형식도 한군데 머무는 방식과 여러 곳을 도장 깨기 하듯 하는 방식으로 구분하면서 작가 자신은 한 곳에 머무는 방식을 선호한다고 합니다. ‘여러 군데 도장깨는 방식’은 다녀왔다는 흔적을 남길 요량으로 여기 저기 발품을 팔지만 시간이 지나면 기억은 휘발돼 버리고 사진의 흔적만 쾌쾌하게 남기 때문에 별로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책에서 소개하는 그림들은 서울의 원경에서부터 골목길, 파주 남양주 등 서울 근교에서 속초, 남해 해남 등 먼 길을 다녀와야 하는 곳도 있습니다. 그림이 다양한 것처럼 이야기도 종횡무진입니다. 그림이 많아지면서 이야기도 짧아지는 듯합니다.
한 곳에 오래 머무는 여행은 그곳을 깊게 이해할 수 있어 좋기는 한데 삶이 유한하기 때문에 갈 수 있는 장소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도장 깨기 여행을 그저 다녀왔다고 자랑하기 위한 여행이라고 평가절하 할 일도 아닐 수 있겠습니다. 그림과 글을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는 궁금한 채 책읽기를 마쳤습니다.